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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갸비 Dec 18. 2022

빙판

미끄러졌다는 건, 방심했다는 증거, 방심은 안심할 때 온다

사진=경향신문 포토뉴스, 이런 빙판길을 어떻게 다니라고   2013.02.06 21:59   홍도은 기자 // 때로는 주의를 해도 피할 수 없는 빙판길이 있다.

“어이쿠”


12월17일 오후 1시30분, 지하철 2호선 신촌역 6번 출구 앞 길거리는 빙판이나 다름없었다. 오전에 쏟아진 눈과 6~7층 높이 꼬마빌딩이 드리운 그림자, 차가운 북풍이 만나 길거리를 빙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기예보를 챙겨본 게 천만다행이었다. 빙판길을 예상하고 워커에 롱패딩, 비니 털모자까지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나온 나였다.


자만이 문제였을까. 6번출구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신촌역 모처로 향하는 길이었다. 발걸음은 당당했고 거리낄 것 없었다. 만반의 채비를 갖춘 난 길거리 사정을 살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모처를 향해 갔다.


그러다 얼음을 밟았고 균형을 잃었다. 강추위에 수도가 터진 건지 뭔지 모르겠으나 보도블록 위로 얼음이 꽝꽝 얼어있었다. 절로 “어이쿠” 소리가 나왔다. 다행히 역도로 다져진 나였다. 위, 아래, 좌, 우 밸런스가 완벽한 탓에 넘어지거나 허리가 삐끗하는 불상사는 겪지 않았다.


“으이구”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목적지인 신촌 모처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까지는 15분가량이 남아있었다. 짐을 풀고, 자리에 앉아, 물을 한 잔 마시면서 숨을 돌렸다. 1분쯤 지났을까. 빙판을 밟고 넘어질 뻔했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그 장면이 또 떠올랐다. 대체 왜 이 장면이 반복해 떠오를까, 고민해봤지만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촌 모처에서 정해진 스케줄을 끝내고 집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랐다. 대설에 한파주의보가 겹친 날 다웠다. 거위털, 오리털 따위로 속을 채운 패딩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구나’ 싶었다. 이내 ‘만반의 준비를 한 게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걸 저 사람들은 과연 알까’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화를 당하고서야 “으이구” “에휴”하며 본인을 탓하겠지. 아까 한 고민의 답이 이거였던 걸까, 싶었다.


따지고 보면 신촌역 6번 출구에서 넘어질 뻔했던 건, 자신만만했기 때문이었다. 추위는 롱패딩과 털모자 비니로 막고 빙판은 워커로 극복 가능하다는 생각에 난 길거리 상태를 살피지 않았다. 부주의했다. 잘 대비했으니 문제없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킨 게 화근이었다.


문제는 늘 안심할 때 생겼다. 내 사람이 분명하다고 믿었던 사람이 늘 마지막에 기대를 배반했고, 모임을 준비하며 꼭 올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 일이 생겼다며 오지 않았다. 예상은 기대를 벗어나기 일쑤였다. 기대감이 클수록 낙담도 깊었다.


“당연하다는 생각은 당연하지 않은 결과로 돌아온다”


최근 사업체를 운영하는 가까운 지인 하나는 채용을 앞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아르바이트생 두 명 중 한 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할 심산이었다. 한 명은 자신과 합이 잘 맞았고 다른 한 명은 늘 삐걱댔다. 그는 합이 잘 맞았던 친구에게 입사를 제안하면 99% 받아들일 줄로 믿었다. 연봉을 업계 평균보다 후하게 쳐줘야겠다고 마음의 준비까지 해둔 터였다. 혼자 김칫국을 사발로 드링킹 했던 셈이다.


결과는 꽝이었다. “우리 회사에 오면 5년 뒤에는 네 동기들보다 배는 더 버는 직원으로 만들어줄게”라는 말로 입사를 제안했지만 돌아온 답은 “죄송합니다, 정말 가고 싶은 회사가 있어서요”였다. 지인의 회사는 그 친구가 정말 가고 싶은 회사에 가기 위한 경력 한 줄에 불과했다. 지인은 “당연히 우리 회사로 올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 친구를 놓친 것 같다”라고 한탄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빙판을 마주한다. 그리고 자주 미끄러진다. 미끄러지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길거리를 걸을 때 주의를 기울여 바닥상태를 살피면 된다. 빙판이 되지 않은 마른 보도로만 걸으면 된다. 이러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안심하고 편하게 휘적휘적 걷다가는 빙판길에 넘어져 몸과 자존심 모두 상처를 입기 십상이다.


준비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우리는 늘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주의력을 가져야 한다. 물론 자주 이 사실을 까먹고 넘어지는 게 현실이다. 혹은 제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빙판길이 있다. 가령 위의 사진처럼. 이게 사는 거 아닐까. 해서 난 “으이구” “에휴”를 입에 달고 산다. 그래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제 갈 길을 가니 괜찮다. 사실 핵심은 넘어지고도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기보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어날 뻔뻔함과 제 갈 길을 가는 용기다. 빙판길 교훈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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