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밥에 고기 국’이면 매일매일이 천국일 줄 알았는데

by 갸비

모든 것을 망친 원흉을 꼽자면 단연 ‘풍요’다. 우리는 그토록 풍요를 바랐지만 갖은 고초 끝에 쟁취한 풍요가 파멸의 씨앗이 될 줄은 몰랐다. 풍요 속에서 우리는 충만, 행복,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호시절은 금세 지나간다. 풍요 뒤에 빈곤이 와서가 아니다. 풍요에 익숙해져서다. 충만, 행복, 만족의 유효기간은 우리 생의 단 며칠, 길어봐야 몇 주 간만 지속된다. 감각은 결국 무뎌진다. 좋을수록 더 그렇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길어야 30개월이듯이 말이다.


거짓말 같다고? 우리 일상에서 행복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도파민이 가장 많이 분출될 때는 언제일까. 정신과 의사는 섹스할 때라고 한다. 여기에 마약을 더하면 도파민은 평소의 수십 배가 더 분출된다. 그러나 모든 자극이 그러하듯, 처음이 가장 짜릿하고 이후는 둔해진다. 더 큰 행복과 만족을 찾는 중독자는 마약을 더 많이, 더 자주, 투약하고 섹스한다. 괜히 마약사범 적발 기사에 남녀 여럿이 한 방에서 발견됐다고 묘사되는 게 아니다. 이들은 과연 더 행복하고 만족할까? 아니다. 처음과 같은 행복과 만족 결코 다시 느끼지 못한다. 좋은 건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 몸은 좋은 것일수록 쉽게 적응하고 이내 싫증내기 시작한다.


이건 요즘 서른 중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절을 누린 게 지금 삼십대다. 과거 세대라면 생애 전체를 통틀어서도 누리지 못할 온갖 즐거움을 지금 이십 대, 삼십 대 초반에 이미 다 경험한다. 가령 과거에는 부유층 노년이나 사고 먹고 누렸던 사치를 MZ세대도 거리낌 없이 ‘FLEX’하고 ‘인스타에 인증’한다. 한 세기 전과 비교하면 적어도 한, 두 세대 앞서서 재미의 끝판왕인 사치에 맛을 들인 셈이다. 사치는 마약과 같다. 강렬한 자극, 일시적 만족감, 허무한 끝 등 많은 부분에서 둘은 닮았다. 인생 말년에나 즐겨야 할 사치를 일찌감치 해버리니 서른 중반 이후로 이보다 강한 자극이 오기는 어렵다. 이후 삶이 급속도로 재미없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이런 반론이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돈이 없으니까 즐기지 못해 노잼인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한 경제 매체에서 코인으로 파이어한 30대 12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12명 중 코인으로 일군 자산이 30억 원을 초과하는 이는 9명, 75%였다. 나머지 3명도 파이어를 했으니 앞선 이들에 준하는 자산을 일궜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행복할까? 얼마나 행복한가 물었더니 ‘지금 삶에 만족한다’는 응답이 2명, 큰 차이 없다가 7명, 불행해졌다가 1명, 기타가 4명이었다. 선망의 대상인 ‘영&리치’ 인데도 행복하다, 만족한다고 응답한 이는 고작 2명에 불과했다. 경제적 자유, 곧 풍요가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볼 수 없는 사례가 아닐까.


“풍요가 모든 걸 망쳤다”


20세기 분석철학의 창시자이자 195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이 한 이야기다. 그가 제시한 대안은 다음과 같다. 과유불급을 피하고, 자극에 매몰되면 안 된다고 했다. 러셀은 사람을 나이가 많든, 적든, 집안이 여유롭든, 궁핍하든 간에 재미에 목숨을 거는 게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러셀은 모든 인간을 아드레날린, 즉 흥분 호르몬에 중독된 존재로 정의했다.


러셀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 인간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평생 즐거움만 쫓으며 산다. 문제는 주변에 흔하고 얻기 쉬운 일시적 즐거움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건 또 다른 문제를 부른다. 일시적 즐거움에 빠지면 웬만한 자극으로는 진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러셀은 자극만 쫓는 사람을 처음 후추를 먹은 후 그 만족감을 잊지 못해 병적으로 후추만 갈구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처음 후추를 접한 사람은 강렬한 풍미에 큰 만족감을 느낀다. 이후 그는 반복적으로 후추를 먹어대지만 결코 처음의 그 만족감을 다시 느끼지 못한다. 러셀은 이 일화를 통해 일시적 즐거움만 추구하다가는 본연의 재미, 행복과 멀어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모든 중독자는 같은 과정을 거친다. 끊임없이 자극을 받으면 이를 받아들이는 감각이 둔해져 결국 자극을 못 느끼고 즐거움, 만족감도 사라진다. 이를 한 단어로 노잼이라고 한다. 러셀은 이를 ‘지나친 자극과 이로 인한 피로’라고 표현했다. 신경과민 피로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노잼의 주원인이라고 했다. 자신이 지나치게 불안이 높거나 쉽게 분노에 휩싸인다면 99% 이상 신경과민 피로를 겪고 있는 것이라 보면 된다고 했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자극과 만족감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근본적인 만족감을 표면적인 쾌감으로, 지혜를 얄팍한 재치로, 아름다움을 생경한 놀라움으로 바꾸어버린다.... 일정한 양의 자극은 건강에도 이롭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문제는 그 양에 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대책은 의외로 심플하다. 자극에서 한 발짝 멀어져 권태를 느껴보기. 일부로 권태로운 시간을 가지기. 불안하거나 분노에 휩싸일 때는 숙고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어린이나 젊은이가 진지하고도 건설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고, 권태가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면 아무리 엄청난 양의 권태라도 자진해서 참아낼 것이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세대는 소인배들의 세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느린 변화의 섭리와는 지나치게 멀어진 세대, 모든 생명력이 마치 꽃병에 꽂힌 꽃처럼 서서히 시들어가는 세대가 될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러셀은 노잼을 벗어나려면 권태를 견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가능한 대안일까라는 현실적 의문이 앞선다. 사회는 갈수록 풍요로워지고 풍요가 더해 갈수록 노잼을 겪는 시기는 더 빨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나날이 연장돼 노잼으로 살아야 하는 나날은 더 길어질 게 뻔하다. 매일매일 우리 기억을, 감각을 리셋하지 않는다면 자극에 둔감해진 우리는 결국 또 노잼으로 하루, 하루를 버텨내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순환을 끊을 방법은 정녕 ‘권태’를 참으라는 구닥다리 방법밖에 없는 걸까. 실상, 권태를 참아내는 것조차 큰 의지가 필요한데 과연,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에게 가능한 과제일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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