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치니코프를 찾아가 따질 뻔했다. 알고 보니 서른 중반이 노잼이 된 건 모두 메치니코프 때문이었다. 메치니코프가 누구냐고? 한국 요구르트 광고에 등장하는 ‘생명 연장의 꿈, 메치니코프’ 바로 그 인물이다.
일리야 메치니코프는 러시아 출신(현재는 우크라이나 지역) 생물학자다. 메치니코프는 특정 세포가 몸 안에 들어온 세균을 삼킨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를 ‘비특이적(선천성) 면역’이라 일컫는데 메치니코프가 밝혀냈다. 메치니코프는 이 발견으로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다.
노벨상을 받을 무렵 메치니코프는 장수 연구에 푹 빠져있었다. 그는 인간이 나이가 들수록 몸에 독이 쌓여 죽는다고 봤다. 독은 대장에 쌓이고 독의 정체는 미생물이라고 봤다. 이 미생물을 제어하는 물질을 찾다가 불가리아 농부들이 많이 먹는 사워 밀크(신맛 우유)에 주목했다. 불가리아는 장수하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특히 농부들이 오래 살았다. 뭐가 다른가 봤더니 불가리아 농부들은 사워 밀크를 물처럼 마셔댔다. 메치니코프는 ‘유레카’를 외쳤다. 프로바이오틱 이론은 여기서 탄생했다. 놀랍게도 이후 전 세계 평균 수명은 63%가량 올랐다. 여기서 잠깐. 메치니코프랑 서른 중반 노잼이 무슨 관계냐고? 있다, 분명히 있다.
애당초 우리 인간에게 서른 이후의 삶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UN 통계에 따르면 1800년대 세계 인구의 평균 수명은 32세였다. 만약 우리가 1800년대에 태어났다면 서른 초반 즈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것이다. 우연찮게 서른 중반을 넘어서도 목숨을 부지하면 마을에서는 이미 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800년대 당시 사람들은 서른이 되기 전 방향이 어긋난 사랑니에 충수염으로 죽거나, 맹장이 터져 급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후 눈부신 의학기술의 발달, 수도와 전기 등 사회기반시설이 폭넓게 깔리면서 인류의 평균 수명은 1950년대 48세, 2012년 70세까지 늘어난다.
좀 더 시계열을 넓혀 볼까. 레이 커즈와일이 쓴 『특이점이 온다』에 따르면 구석기시대 크로마뇽인들의 평균 수명은 18세, 고대 이집트인은 25세, 중세 유럽인은 30세에 불과했다. 적어도 4만~1만 년 동안 인간은 기껏해야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만큼 살다가 떠났다. 평범한 사람이 서른 이후 삶을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이제는 납득이 되는가. 길게는 수 만 년 전, 짧게는 200년 전만 해도 서른 이후 삶은 우리에게 ‘덤’에 불과했다.
덤이란 건 있으면 좋고 없어도 딱히 아쉬울 게 없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서른 중반이 무의미한 건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시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전 인류에게 ‘덤’을 준 인물은 바로 메치니코프다. 이쯤 되면 원망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쓸데없이 생명 연장의 꿈을 품어서, 우리를 노잼으로 빠뜨린 메치니코프, 요즘 말로 부르자면 노잼 빌런이다.
서른 중반까지 우리를 살게 해서 인생 노잼을 맛보게 한 빌런이 메치니코프라면, 서른 중반 이후 마땅히 일할 거리를 만들어놓지 못한 이들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바로, 근대 교육 체계를 만든 이들이다. 근대 시기 인류 수명은 기껏해야 서른 남짓이었고 교육 체계는 그 절반인 십 대 중반까지만 만들어뒀던 것이다. 시간은 흘렀고 수명은 두, 세 배가 늘었지만 교육 체계는 여전히 우리 수명이 서른 남짓이었던 때에 머물러 있다. 이 간극이 우리 인생 노잼의 또 다른 원인이다.
초등 교육을 의무화한 근대 교육은 18세기에야 국가 주도로 도입됐다. 산업혁명이 결정적 계기였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발달하면서 학교 교육을 받은 수준 높은 노동자가 대거 필요해졌다. 국가 차원에서 장려했다. 교육받은 국민은 하나의 국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통된 정체성을 갖게 됨으로써 통치 편의성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었다. 이후 20세기 들어 모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중등교육이 의무화됐다. 통일된 지식과 규범을 제대로 배웠는지 확인하는 장치로는 ‘시험’이 쓰였다. 시험이 교육과 결합하자 시험을 통해 획득하는 학력이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기능을 하게 됐다. 머잖아 학력 경쟁이 발발했다. 교육은 학교 교육 위주로 흘러가게 됐다.
앞 장에서 봤던, 이른바 사회가 부과하는 외재적 동기가 작동한 게 이때부터다. 평균 수명이 32세에 불과했던 18세기에 만들어진 근대 교육 제도는 십 대 중후반까지만 가르치면 된다고 봤다. 인생의 절반은 배우고 나머지 절반은 배운 지식을 써먹고 또 후학을 가르치는 데 쓰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균 수명이 여든을 훌쩍 넘는 요즘 교육 체계를 설계했다면 마흔까지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봤을 텐데. 여러모로 아쉽다. 공통된 학습, 교육 과정이 없게 되면 스스로 목표를 세워야 하지만 그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통은 주변을 참고하며 되는대로 살기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처럼 노잼을 맞이한다.
수명 연장, 구닥다리 교육체계가 아니라도 서른 이후는 어차피 노잼일 수밖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이상과 현실 간 괴리다. 전체 인생에서 행복은 스마일을 그린다고 한다. 여론조사 기관 ‘갤럽 월드 폴’이
2010∼2012년 소득·학력·취업 같은 변수를 통제하고 ‘인생 만족도’와 ‘나이’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더니 미국·영국·독일·중국·라틴아메리카 등 여러 지역에서 ‘U’ 자형 행복 곡선이 나타났다.
20대 초반에 행복은 정점을 찍고 50대까지 계속 하락하다가 바닥에서 반등해 여든에서야 다시 정점을 찍는 게 일반적인 나이대별 행복 곡선이라고 한다. 30대 중반이 된 우리가 대체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 어디까지 재미가 없어지는 거야라고 한탄하는 게 이상할 것 하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조너선 라우시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전 수석연구원은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에서 50대까지 행복 지수가 계속 하락하는 이유로 미래를 낙관하고 도전했다가 실제 마주치는 현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괴리’를 꼽았다. 즉 야망은 큰데 막상 현실은 이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는 자기 자신을 ‘알고’ 기대치를 낮추니까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게 핵심이다. 결국 행복은 ‘자신이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달린 문제’란 것이다.
메치니코프는 장내 프로바이오틱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과 연관 있다고 보고, 사람들에게 사워 밀크(프로바이오틱)를 강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메치니코프가 하나 빼먹은 게 있으니 바로 ‘행복하고 즐겁게’ 오래 사는 것이다. 단순히 오래 살기만 해선, 우리 인간이란 족속은 행복함을 느끼지 못한다.
조너선은 쉰은 돼야 다시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조너선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 서른 중반, 앞으로 이십 년 가까이 노잼을 감내해야 한다. 지긋지긋한 일상, 노잼 일상을 또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부터 나온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주먹을 쥐어본다. 기왕 살게 된 거, 50 이후는 정말 더 행복해지나 한 번 살펴볼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한숨이 나고 가슴이 답답한지 모르겠다. 적어도 15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더 불행해진다는 게 사실이 아니길 부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