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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31. 2016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차

인도 기차 화장실 앞에서 잠이 들었다.

로마에 젤라또가 있다면 바라나시엔 라씨가 있다. 걸쭉한 요구르트에 과일을 곁들여 먹는 이 음식은 현지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입맛에 맞는다. 라씨 가게에는 전 세계 말로 적혀있는 낙서들이 있다. 한국어로 된 낙서도 꽤나 보인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곳 같다. 한국에 누군가가 이 기술을  전수받아 장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한번 먹어봐야겠다. 


하루를 빼곡히 바라나시에서 보냈다. 라씨도 먹고 보트를 타고 강에서 보았던 가트(시체를 태우는 화장터)도 걸어서 가보았다. 바라나시의 곳곳을 걸어 다녔다. 구석구석 매력적인 곳이 많다. 처음엔 더럽다고 생각한 장소들이 이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길을 걷다 보니 전통악기들을 가르쳐주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 중에 음식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는 것이 재밌듯이 악기를 배우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 우리는 라씨를 먹고 젬배를 배우러 들어갔다. 같이 간 경수는 손가락이 퉁퉁 부을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고 나 또한 오랜만에 치는 젬배에 신이 났다. 


젬베 치고 산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다. 골목길에 늘어진 상점들을 구경하며 살만한 것이 없나 찾아보는데 비가 부슬부슬 온다. 중간에 꽤나 세차게 오길래 상점 안에서 비를 피하는데 옷 가게 아저씨가 내게 빨간 옷을 권한다. 예쁘긴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그냥 돌아서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기차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에 기차가 있다. 기차역에 먼저 가서 기차표를 예약할까 했는데,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에 티켓팅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지 몰랐다. 저녁이 되고 짐을 쌌다.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보이는 것은 더러운 첫인상, 냄새나는 도시, 비위생적이고 쓰레기가 여기저기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지는 무법천지의 땅, 더럽고 혼잡한 도시, 빵빵 거리는 릭샤 소리, 난폭한 운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도한 자태로 돌아다니는 소, 건물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원숭이, 진흙투성이 바닥에 듬성듬성 있는 큰 소똥과 작은 염소똥, 길거리에 널브러져 누워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떠날 때 보이는 것은 간절히 손을 내미는 할머니들, 맑고 큰 눈을 가진 소년들, 쑥스럽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소녀들, 경건한 자세로 목욕하는 힌두인들, 가족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집안의 가장이었다.

바라나시에서 네팔로 가는 순간 이제  떠나는구나 하며 아쉬워하던 찰나에 릭샤기샤가 엉뚱한 곳에 데려다 주고 돈을 요구한다. 아 이곳은 인도구나, 이곳은 인도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밤 열두 시가 넘은 이 시간 캄캄한 기차역에 도착한 우리는 이제 곧 네팔로 떠날 마음에 다시 한번 아쉬운 마음 추스른다. 인도에 고작 일주일 가량 있었지만 인도는 참 이상한 나라다. 더럽고 냄새나고 신경질 나는 상황이 많이 벌어짐에도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 같은 아쉬움이  마음속에 떠나질 못한다. 처음 왔을 때 절대 다시 오지 않겠다는 그 다짐이 떠나는 순간 깨져버렸다. 무엇 때문에 다시 오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없다. 인도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 언젠가 다시 오겠다는 소망하나 살포시 내려놓고 네팔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인도에서 있던 일들을 글로 정리했다. 스마트폰과 연동되는 블루투스 키보드로 글을 쓰는데 수백 마리의 개미가 자꾸 의자 위로 올라온다. 개미를 피해서 일어나서 쓰고 있는데 옆에 있던 인도 아저씨가 키보드를 보고 신기했는지 괜히 말을 건다. 아저씨에게 기차 시간을 물어보니 아저씨는 이곳에서 기다리면 금방 올 것이라고 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기차에 타면 침대칸에 누워서 잘 수 있다는 마음에 행복해졌다. 시간이 지나고 기차가 도착했다. 기차를 보는 순간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자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통로에도 앉아있고 침대에도 눕지 못하고 3-4명씩 같이 앉아있다. 우리는 자리를 찾으러 헤매다가 자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 화장실 앞으로 왔다. 나는 기차 칸이 연결되는 부분과 화장실 앞에 다이소에서 산 1000원짜리 방석을 깔고 앉았다. 하루 종일 걸어 피곤한 터라 쪽잠을 자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계속 지나다닌다. 화장실 문을 열 때마다 찌린내가 진동을 하고 벌레들이 바닥에 기어 다닌다. 화장실 문이 내 쪽에만 자주 열리는 것 같다. 아까 기차표를 예약하고 타자는 경수 말을 듣을걸 그랬다. 앞으로 인도 기차는 무조건 예약하고 타야겠다. 꽤 많이 지나온 것 같은데 고락푸르까지 도착하는데 앞으로 6시간 30분이 남았다. 서로 돌아가면서 쪽잠을 자기로 했는데 경수 차례에 내 눈이 감긴다. 가방은 억지로 어딘가에 우겨넣었다. 나도 자고 싶지만 가방 안의 물건을 훔쳐갈까 봐 잠들지 못하겠다.  


어떻게든 잠을 이겨내 보고자 글을 썼다. 예상치 못한 고통이 찾아왔다. 군인일 때 근무를 섰던 것이 기억난다. 이병 시절, 잘 시간도 충분히 안 주고 외울 것도 엄청 많고 근무도 많았던 터라 그때 죽을 맛이었다. 너무 졸려서 근무를 서면서 볼펜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그래도 졸렸다. 그런데 같이 근무를 서던 선임이 내 손바닥을 보고 더 뭐라고 했다. 졸린 거 티 내면서 근무 설 거면 네가 선임하라고 했다. 자기는 잘 꺼 다자면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아주 편하다. 잠도 두 시간이지만 깊게 잤고 내 손에는 스마트폰도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지켜야 할 때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런 능력을 길러준 선임에게 고맙기까지 하다. 잘 살고 있으려나. 군대 전역하고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만 이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 한 명이 그 선임이다. 갑자기 인도 화장실 기차 칸 앞에서 그 선임이 보고 싶다.

3등 기차 석도 불평불만하다가 7시간짜리 입석 기차를  타고나니 앉아서 갈 수 있는 기차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은 이토록 간사해서 어떠한 일에 쉽게 감사할 줄 모른다. 상황이 나빠질 때 많은 생각들을 뒷받침하여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한다. 합리화된 상황이 예전 것 혹은 내가 바라는 것과 비교했을 때 떨어지는 것이면  마음속에 실망이 자리 잡는다. 그것이 지나치면 그 실망은 더욱 크다. 그러나 어려워진 현실은 조금만 좋아져도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에 자리가 났다. 화장실 옆칸에 앉아 사람들의 발길에 치이다가 침대에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다. 침대 시트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스러기, 찐득찐득하게 마찰하는 땀이 난 몸과 침대 시트, 기어 다니고 날아다니는 귀여운 벌레, 꾸리꾸리 한 땀냄새와 시끄러운 소음에 개의치 않는다. 피곤한 몸을 누일 수 있게 허락해준 친절에 무한 감사할 뿐이다. 인간은 이리도 간사하다.


감사는 더 좋은 조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태도에 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진정 천국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천국과 같은 기쁨을 안고 산다. 


여지껏 타 본 기차 중에 가장 열악한 기차를 탔지만 이곳에서 값진 깨달음을 얻었다. 좋은 좌석과 맛있는 음식, 빠르고 정확한 기차도 좋지만 소중한 가르침을 내게 알려준 인도 기차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차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풍성해졌다. 감사가 넘치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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