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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31. 2016

태어난 배경에 따라 신앙은 결정되는가?

히예로니무스의 노력과 나의 길

히예로니무스(제롬)는 성경번역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어거스틴과 동시대에 태어나 어거스틴에게 멍청하다고 무시를 당했다. 어거스틴이 신학적으로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 아주 큰 영향을 준 것은 어거스틴이 아니라 다름 아닌 히예로니무스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의 사람은 어거스틴과 같은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히예로니무스와 같이 조금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고 내 뜻대로 뭔가 이뤄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좌절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다. 어거스틴은 좀 재수없다. 하나님이 좋은 머리를 주셨으면 겸손할 줄 알아야지. 나는 어거스틴 보다 오히려 열등감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침착히 지켜보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히예로니무스의 모습이 훨씬 존경스럽고 멋지다.  

당시에 성경은 일반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 손으로 일일이 쓰느라 아주 비싸기도 하였고 가지고 있다 한들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읽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게 어려운 성경을 쉽게 풀어서 쓴 사람이 히예로니무스다. 히예로니무스는 성화에서는 사자의 입 속에서 가시를 빼준 인물로 상징된다. 

그가 성경을 번역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라틴어에 능통해야 하고 완벽하게 그 원래 뜻을 전달하기 위해 학문적으로 굉장히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완벽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그는 완벽한 번역을 위해 완벽한 준비를 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정작 히예로니무스가 성경을 번역한 장소에 와보면 그렇게 완벽한 준비를 하고 갖춰진 장소에서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번역을 한 장소에 와보니까 차가운 동굴 바닥과 돌덩이들이 있을 뿐. 훌륭한 서재와 완벽한 작업도구들은 없다. 오히려 비좁은 공간이 있을 뿐이다.

히예로니무스는 열악한 공간이지만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준비를 했을 것이다. 불가타(히예로니무스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의 이름)라는 위대한 성경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내가 상상한 것처럼 엄청난 비용과 지원이 먼저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차가운 동굴 바닥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성경과 씨름하는 과정 가운데 번역된 것이었다. 


나의 완벽한 준비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을 수 없다. 처한 상황에서의 완벽한 준비는 최선이지만 그 이상의 것,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자신의 완벽하지 않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결국 완벽을 향한 가장 완벽한 준비가 아닐까.

글을 쓰다 보니 똥이 너무 마렵다. 급하게 마려운 것을 보니 설사의 징조가 느껴진다. 히예로니무스도 이곳에서 똥이 마려워보았을 것이다. 똥도 마렵고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을 것이다. 히예로니무스도 같은 인간이었기에 나와 같았을 것이다. 히예로니무스의 번역 장소에는 가톨릭 성당이 들어서 있다. 성당에서 부르는 찬송가가 여기까지 울려 퍼진다.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하다. 내가 만약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나도 저기 어디선가 찬송을 부르고 있을 것이다. 보수적인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샤바트 때 털모자를 쓰고서 토라를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태어났으면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불교에서 태어났으면 절에서 삼천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도에서 태어났으면 바라나시에서 목욕을 하면서 시바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태어난 배경에 따라 신앙은 결정되는가? 내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기독교의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니체 같은 사람을 보면 아버지가 목사인데 무신론자이기도 하고 네팔에서 만난 수녀님의 동생은 목사님이기도 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서 오히려 기독교를 더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았을 때 태어난 배경에 따라 신앙이 결정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모님이 믿는 그 무언가가 어릴 적부터 학습되어왔기 때문에 그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학습된 것으로부터 벗어나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학습된 것 또한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만,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광야 위에 서있을 때 내가 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을 때 나는 너무나도 연약하다. 내 안에 내가 많지만 진정한 나는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하자니 학습된 것을 모두 잊어버리기가 참  힘들뿐더러 내가  발현할 수 있는 것 또한 학습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해되지 않는 세뇌와 같은 것에서 벗어나 내 머리와 가슴이 따라가는 곳으로 내 발걸음을 옮기자. 남이 만들어준 길은 어디에 무엇이 있고 이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반면에 내가 만드는 길을 어디에 어떤 것이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다. 그 길이 진실된 나의 길이고, 반석과 같은 나의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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