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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31. 2016

나 또한 너와 같은 무고한 사람이었다.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

입구에서부터 무리 지어 모여 있는 학생들, 아마도 견학을 왔나 보다. 가이드의 인도를 따라 걸어가는 학생들 중에는 역시나 장난치는 학생도 있고, 여자친구와 노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경청해서 듣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들의 상처받은 영혼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카우 수용소

찢겨진 토라, 무너진 회당. 뮌헨에 있는 유대인 수용소인 다카우 수용소에서 '얼마나 잔인한 일들을 히틀러가 행했고, 앞으로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라는 것을 중점으로 한다면, 여기 예루살렘의 야드 바쉠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전 유대인들의 생활모습부터 각 지역에서 몇 명의 희생자가 생겼는지에 대해 다룬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사람들이 기록했던 작품과 그림, 당시에 존재했던 토라와 폭격으로 인해 부서진 회당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또 어떤 과정을 통해 홀로코스트가 이뤄졌는지에 대해서 다룬다.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글로 기록을 남긴다. 전시관을 들어가서 걷다 보니 1941년에 찍은 고등학교 졸업사진이 보인다. 이 사진에는 각자의 이름이 모두 쓰여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모두 적혀있다.  

'호론츠크'라는 한 가족의 구성원도 모두 소개가 되어있다. 창문을 닦던 사람이었고 가족이 5명이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예세크 죠셉, 예세크 심카 등이다. 가방 펜 카드박스 거울 바구니 아이가 누워있던 침대, 아이가 입던 옷이 모두 그대로 전시가 되어있다. 학살은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불현듯 다가온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다카우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 

매일매일이 개보다도 못한 생활이었다. 눈을 뜨면 매일 무언가에 쫓겨 뛰어야 했고 매일매일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도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께 물어보았다. "아버지 이렇게 개처럼 사느니 그냥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안 될까요?" 아버지는 내게 대답했다. "내가 개처럼 사는 것보다 내 자식이 개처럼 사는 게 내게는 더욱 고통스럽다 아들아. 그러나 스스로 죽으면  안 된다. 토라에 자살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하나님이 구해주실 것이다. 기다리자." 얼마 안가 아버지는 차가운 눈 위에서 돌아가셨다. 무덤은 볼품없게도 약간의 흙과 눈으로 묻어버렸다. 내리는 눈을 보며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했다. "자살하지 말자." 그리고 지금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시간이다.


스크린에서 한 기차의 모습을 보여준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열차를 보니 인도에서 탔던 기차가 생각난다. 정말 힘들었던 인도 기차지만 아우슈비츠 행 기차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는 사람이 타는 열차가 아니었다. 화물을 실어나르는 기차 안에 사람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떠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중요한 소지품을 맡기게 하고 사람들은 그저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채 수용소로 갔다. 샤워를 목적으로 옷과 신발 마저도 벗기고 나서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개운해질 것을 기대했겠지만 그들은  더운물이 아니라 독가스를 마셔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수상한 낌새를 챘을 것이고 어떤 이는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람들은 잔인하게 죽어갔다.

다카우 수용소에 있는 그림

유럽 각지에서 수용소로 끌려간 이들은 머리를 깎고 수용소 생활을 했다. 움푹 파인 눈, 뼈 위에 덮인 가죽, 고통마저도 무감각해질 만큼의 학대를 당하면 시체가 되어 버려진다. 죽은 시체들은 여기저기 버려져있다가 한 번에 이곳저곳 묻힌다. 지게차 몇 대가 와서 시체더미를 모래더미를 미듯이 구덩이에 밀어 넣는다. 한 독일 병사가 와서 표지판에 글씨를 쓰고 땅에 박는다. 표지판에는 '무덤 번호 4번 1945년 4월 26일 1000명이 이곳에 묻혀있음', '1500명이 여기에 묻혀있음' 등이 적혀있다.

'야드 바 쉠' 이름을  기억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이름의  공간이라는 장소는 희생자 목록과 기족 관계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전시되어있고 이것을 공개적으로 열람할 수 있게 해놓았다. 그리고 그 입구엔 이렇게 쓰여 있다.


'나 또한 너와 같은 무고한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 지금 유지되는 평화가 언제까지고 영원할 수도 없다. 평화로운 유대인 가정에 찾아온 죽음보다 잔인한 학살이 있었던 것처럼, 비극은 그렇게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올 수 있다. 내가 무고하다는 것은 비극으로부터 나를 막아줄 수 없다. 비극을 당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무고하기 때문이다. 비극을 피할 수 있다면 최선의 방법은 기억하는 것이다. 비극을 당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날짜를 기억하고 기억을 통해 다시 다짐하는 것.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마사다에서의 비극이 65년 전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통해 반복되었다. 역사는 이처럼 반복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일본이 우리를 강제로 침략하여 수탈했다. 이와 같은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의 미래에 책임감을 느낀다. 무거운 마음을 갖고 야드바쉠을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내일은 최후의 항쟁이 있었던 마사다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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