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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31. 2016

제발 누가 저 좀 도와주세요!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다.

버스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버스를 탔는데 버스에 스마트폰을 두고 내렸다. 버스 아저씨가 빨리 내리라고 닦달하는 바람에 허겁지겁 내린 것이다. 네팔에서는 안경을 두고 내렸는데 이번엔 스마트폰을 두고 내렸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숙소 예약도 하고 비행기 티켓도 예매하고 사진도 찍고 페이스북에 글도 올리고 카카오톡이나 위쳇으로 사람들과 연락도 하는데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다. 무려 스마트폰을!  


정신이 황폐해졌지만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무조건 찾자' 안되면 될 때까지 찾으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라고 생각하며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고속터미널에 있는 군인에게 물어보니 인포메이션에 물어보라고 했고 인포메이션에 물어보니 보안관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보안관에게 물어보니 다른 보안관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 보안관은 기다려보라고 했다.  15분가량을 기다렸을까 보안관이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고 어떤 복도에 날 데려다 놓고 사라져버렸다.


'......'


적막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청소부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아저씨는 나를 분실물 센터로 데려갔는데 서랍을 뒤져봐도 내 물건이 없었다. 아저씨는 나를 다시 어떤 사무실 같은 곳으로 데려갔다. 거기엔 뚱뚱하고 나이가 많지만 열심히 화장하는 아줌마와 이미 화장을 모두 끝낸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더니 나보고 핸드폰을 찾았으니 11시까지 다시 이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멍 때리기를 두 시간 정도 하다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커피를 3캔 사갔는데 이는 내 점심값 정도가 되었다. 제일 열심히 도와준 청소부 아저씨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100 셰켈(3만 원)을 드리려고 했지만 같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아저씨만 드리기엔 조금 상황이 난처했다. 아저씨는 라마단(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지 않고 기도하는 기간) 기간이라 커피를 저녁에 드신다고 하셨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순간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유대인이건 무슬림이건 한국인이건 제발 누구든지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난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종교와 인종과 문화를 떠나서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을 때도 이토록 도움이 갈급했는데 하물며 생명은 어떠할까?


2천 년 전, 이스라엘에 살던 누가라는 사람이 쓴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누가복음 10장 30절-35절 中)


나는 그동안 누군가를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들으면서 내가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입장에서만 생각해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의무감에 의해서 선행을 하게 되고 이 말씀을 까먹고 있다가 가끔 목사님이 교회에서 설교하시면 그때부터 다시 조금씩 하게 되었다. 근데 내가 직접 난처한 상황이 되어보니까 사마리아인의 입장이 아니라 쓰러진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간절함, 누구든지 상관없으니 나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그 갈급함.


내가 직접 겪어보니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도와주면서 행복감을 느껴서 신학교에 입학했다. 근데 그 행복감이 누군가를 도와주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자랑하는 것에서부터 행복함이 출발한다는 것을 느끼고 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진로에 회의감을 가졌다. 근데 내가 도와주는 입장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니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내 행복감을 위한 취미생활 같은 것으로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은 나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다른 사마리아인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유대인을 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도와주었다고 말이다. 그래도 사마리아인은 도와주었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민족적인 문제를 초월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자존심을 내던지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면서 선한 사람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말한 것과 같이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위해 살았다. 사람들로부터 왕따도 당하고 배신도 당하고 모욕도 당하고 천대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냥 그렇게 사셨다. 그리고 그렇게 죽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그런 일인 것 같다. 마사다에서 쿰란까지 다녀와 몸이 너무 피곤하지만 스마트폰도 되찾고 내 미래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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