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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y 21. 2016

여행 끝, 일상 시작

70일간의 지구 한바퀴 여행

2015년 6월 17일-2015년 8월26일
70일 간의 지구 한바퀴 여행

중국(칭따오-단동-고려문-심양-베이징)
인도(델리-아그라-자이뿌르-바라나시-사르나트)
네팔(포카라-카트만두)
터키(이스탄불-이즈니크-우르파)
이스라엘(텔아비브-예루살렘-광야)
스페인(마드리드-톨레도-세고비야-그라나다)
프랑스(파리-애트르타-몽생미셸)
아일랜드(더블린)
아이슬란드(레비야크)
미국(보스턴-뉴욕-워싱턴-시카고-라스베가스-그랜드캐년-LA-얼바인-샌디애고)

그리고 이제 다시 서울.


마음과 생각이 아직 정리가 되진 않는다. 비행기 안에서 끄적여야겠다.

어제 밤새 글을 쓰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다. 피곤과 긴장이 섞여서 그런지 글이 써지지가 않았다.

여행의 마무리에 있어서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이 참 아쉽다. 밤을 새고 비행기에서 잔 다음에 한국에 돌아가 바로 시차를 적응하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되진 않을 것 같다. 그냥 졸려서 일찍 자버렸기 때문이다. 비행기에 타니 비즈니스 좌석은 아니지만 맨 앞좌석을 배정받았다. 앞좌석에 할아버지 두분이 않아계서서 비즈니스인줄 지나쳤다가 다시 좌석 번호를 확인해보니 이코노미가 맞았다. 자리는 때로 사람의 분위기가 만들기도 한다. 비싸보이는 자리도 사람에 따라 싸보이기도 하고, 싼 자리도 사람에 따라 비싸보이기도 한다. 사람이 중요하다.

이번 여행 또한 그랜드 투어였다. 지식적인 것을 알아가는 면이 저번 여행이었다면 이번에는 사람과 사람과의 좋은 인연을 통해 행복을 얻는 여행이었다.

칭따오에서 단동에 도착했을 때 아무것도 몰랐다. 무모하다고 하면 무모하고 어리석다고 하면 어리석은 여행 컨셉일지 몰라도 사실 왠만한 준비 없이 단동에 도착했다.

단동에 여행을 간 이유는 우리말 성경이 어떻게 쓰여졌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에 단동에 가려하는데 여행을 출발하기 전날 구약을 가르치시는 학교 교수님께 연락이 왔다. "여행준비는 잘하고 있어? 중국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가서 만나봐" 그리하여 단동 공항에서 목사님 아들이 나를 픽업하러 왔다. 목사님 아들은 나를 픽업하면서 물어봤다. "여기 뭐 있다고 보러 왔어요?" 약간 퉁명스러운 조선족 말투를 사용했던 그를 따라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모두 갈 수 있었다.

단동에서 고려문으로 갔을 때는 인터넷 신문 기사에 나와있는 표지판 사진 하나보고 찾아갔다. 작은 시골마을이라서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작은 시골마을이어서 문제가 됐다. '헬로우' 한마디가 안통하는 사람에게 연암 박지원 선생의 흔적과 쪽복음이 전해졌던 고려문의 흔적 혹은 그 후손들을 어디서 만날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차역에서 내려서 배낭을 매고 논밭을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중국 할머니 두분이서 나를 부른다. 중국어로 뭐라고 하시는데 한마디도 못알아듣겠다. 나는 그때 문득 중국 유학을 다녀온 고등학교 친구이자 형인 혁재형이 생각났다. 할머니들께 "뚜이부치, 뚜이부치"(죄송합니다. 잠시만요)를 말한 후에 혁재형에게 연락을 했다. 혁재형은 능숙한 중국어로 할머니게 내 상황을 말해주었고 할머니들은 내게 길을 알려주었다.

고려문을 떠나 심양에 도착해서 또 학교 교수님의 도움을 받았다. 그곳에 살고 계신 조선족 선교사님을 만났다. 야간에 도착하는 기차여서 위험했는데 선교사님의 도움 덕분에 한글성경을 처음 번역하신 존로스 목사님의 동관교회와 기타 유적들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선교사님께서 사주시는 맛있는 음식은 덤이었다.

심양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얘기를 나눴다. 그 친구는 '롤'이라는 게임친구를 만나러 심양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마침 내가 보는 페이스북 페이지가 친구의 롤 게임 전적이었다. 우리는 게임 얘기를 하면서 친해졌다. 친구의 이름은 왕자이. 왕자이는 내게 오늘 자신의 생일 파티가 베이징에서 있는데 파티에 오지 않겠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초대에 응했다. 베이징에 도착해서 어떻게 할지 막막했는데 도착하자마자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왕자이의 생일 파티에는 한국의 티비쇼인 런닝맨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왕자이가 사주는 랍스타를 먹고 호스텔에 짐을 푼 뒤에 다시 현지인들이 예약하지 않으면 못가는 바를 갔다. 여행 블로그나 가이드북에는 나오지 않는 것들이었다. 왕자이의 친구들과 함께 밤늦게가지 재밌게 놀았다.

인도에서는 중학교 친구인 경수를 만났다. 평소에 연락하지 않아서 서먹할 줄 알았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같이 여행다니기에 가장 좋은 사람 중에 한명이다. 경수와 함께 갠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라는 동네에 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바라나시에서 한국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 한인민박을 찾아 다녔다. 소똥이 빗물과 섞여 신발과 다리로 튀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찾아간 한인민박에서 신라면 한그릇을 시켰는데 기다리는 동안 예수님 모습을 닮은 동양인 한명이 들어왔다. 한울이형이었다. 한울이 형은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히피족 같았다. 잘생긴 얼굴 덕분인지 긴머리와 수염이 잘 어울렸다. 한울이 형은 언제나 여유로웠다. 매사에 조급한 내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형의 여유속에 평화가 있었다.

인도의 국경을 넘어서 네팔에 도착했다. 네팔 시내로 가기까지는 버스를 타야하는데 버스 안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자뽄? 자뽄?" 나는 대답했다. "노" 그가 또 말을 걸었다. "치노? 치노?" 나는 대답했다. "노" 그가 다시 말을 걸었다. "꼬레아? 꼬레아?" 비로소 나는 "예스"라고 대답했다. 내게 말을 건 청년의 이름은 안잔. 안잔은 내게 왜 왔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봉사활동하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안잔의 표정이 굳었다. 안잔은 그동안 네팔을 다녀갔던 봉사활동자들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했다. 안잔은 한달 전에 지진으로 집을 잃었지만 지금 자신은 행복하다고 한다. 그러나 봉사활동자들이 와서 자신들을 도와주면서 불쌍하다는 듯이 자신들을 대하고 자신들이 가진 종교를 전하려고 하는 태도가 자신들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얘기했다. 누군가를 도와줄 때는 도움 받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봐야한 다는 사실을 안잔을 통해 배웠다.

가서 어떻게든 봉사활동을 할 수 있겠지 생각했던 나는 막상 가보니 진작에 알아보고 올걸 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대 마침 산촌 다람쥐라는 한식당에 가게 됐는데 네팔 난민들을 돌봐주는 수녀원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수녀님들이 계신 곳에 가서 아이들에게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을 찍는 내내 행복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가 최근들어 그 꿈에 회의감을 갖게 됐는데 봉사에 대한 구체적인 확신이 생기게 됐다.

네팔을 떠나 터키에 도착했다. 이스탄불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는 경인이형을 만났다. 미래도 없이 여행만 다닌다고 손가락질 했던 사람들에 비해 경인이형은 여행을 다니며 미래를 찾아다니는 것이 젊음이라고 말해주었다. 이스탄불에서 맛있는 음식도 얻어먹고 형에게 용기도 얻었다.

이스라엘에 도착했을 때는 유대인 누나인 아비야 누나를 만났다. 안식일에 누나네 가정에 초대받아서 많은 것들을 대접받았다. 마치 추석과 같은 분위기였다. 금요일, 토요일 내내 정통 유대인 가정체험을했다. 아비야 누나의 어머니가 해주신 치즈케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즈케잌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히브리어 노래를 같이 부르기도 했다. 아비야 누나의 동생의 딸은 이 세상 유대인 중에 가장 사랑스러웠다. 문화의 차이로 답답함을 느끼긴 했지만 어디서 돈주고도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전웅제 목사님의 소개로 한인 민박집에 가게 됐다. 이스라엘 광야에서 피타빵 하나와 초코바, 2리터 짜리 물로 노숙하면서 지낸 후라 살도 빠지고 수척해졌을 때 용인이형을 만났다. 체크인 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불쑥 찾아온 내게 짜증내기는 커녕 용인이형은 "아침 못먹었제? 저기 라면 있으니까 끓여먹어라. 계란도 저기 있으니까 넣던지 말던지 알아서 하고" 라고 말했다. 그리고 빨래 없냐고 하면서 빨래 내놓으라고 했다. 보통 민박집에서 라면+빨래 하면 한국 돈으로 만원 이상의 돈을 내야한다. 근데 형이 내게 말했다. "여행 다니는 학생이 돈이 어디있노 수건 저기 있으니까 눈치보지 말고 필요한거 있으면 말해라." 아니 뭐 이런 민박이 다있지. 용인이형은 4년째 세계여행 중인데 여행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은혜갚기 프로젝트로 민박집을 2달동안 하고 있다고 했다. 용인이형을 만나러 광주에서부터 25000킬로미터를 오토바이를 타고 온 창식이형과 무전여행을 하는 아람누나, 친구와 같이 여행 온 주현이와 건우를 만났다. 스페인에서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프라도미술관도, 세비야도 ,세고비야도, 톨레도도 아니다. 이들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용인이형네 민박이 가장 좋았다. 다들 한국에 돌아가서 빨리 보고 싶다.

작년 터키여행할 때 만난 용규형을 이번엔 프랑스에서 만났다. 나보다 10살이 많은 형이기에 자연스럽게 가이드님이라고 불렀다.용규형 집에서 신세를 많이 졌다. 10년차 가이드인 용규형을 따라서 2년전에 갔던 몽생미셸과 처음 가보는 애트르타, 그리고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프랑스도 사실 거의 무계획으로 온 것이라 막막했는데 용규형을 만나서 프랑스에 전반적인 것들을 볼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예원누나도 만났다 .작년에 봤던 것 보다 훨씬 반가웠다. 나도 너무 반가웠지만 나를 너무 반갑게 맞아주는 예원누나가 정말 고마웠다. 용규형과 예원누나 덕분에 맨날 패스트푸드나 바게트 같은 빵만 먹다가 프랑스의 제대로된 음식들을 먹어볼 수 있게 됐다.

영국에서는 고등학교 후배이자 군대 후임인 형욱이를 만나려고 했는데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서 한국에서 보기로 했다. 형욱이와 같이 먹으려고 가져온 건빵이 아직도 가방 안에 있다.

보스턴에 도착해서는 고등학교 친구인 주찬이와 유섭이를 만났다. 신호등 건너로 발견한 친구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유섭, 주찬과 함께 미국여행을 시작했다.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갔을 때는 어머니 소개로 문웅이형과 혜자누나를 만났다. 나보다 20살이 많은 형이었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문웅이형은 뉴욕에서 20년이 넘게 패션디자이너로 살아왔고 혜자누나는 한국에서 유명한 디자이너인데 지금은 문웅이형과 같이 살면서 샵을 운영하고 있었다. 형과 누나를 만나고 있을 때 친구들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뉴욕 야경을 봤다지만 나는 문웅이형과 혜자누나와 나눈 얘기들이 더 값지다고 생각한다. 이틀에 걸쳐서 두번을 만났다. 한번은 혼자 만났는데 만나고 나니 너무 좋았다. 좋은 것이 있으면 친구하고 나눠먹어야 한다고 배웠기에 나는 친구들과 함께 문웅이형이 초대한 점심식사를 갔다.

혜자누나는 샵을 지키고 문웅이형과 우리는 점식식사를 하러 갔다. 형은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 식당을 데려갔다. 음식을 먹으며 형과 얘기를 하는데 형이 말하길 인생은 남들 시선을 신경쓰면서 살기엔 너무 짧으니 내 방식대로 즐기라고 했다. 젊을 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면서 청춘을 보내는 것 만큼 후회스러운 일들이 없으니 마음껏 인생을 즐기라는 형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문웅이형은 백남준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7년동안 같이 지냈다고 한다. 세계에서 인정하는 팝아티스트가 왜 이렇게 한국에서 저평가 받는지 모르겠다는 형의 말을 듣고 백남준 선생을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시카고에서는 초등학교때부터 교회에서 알고지낸 웅기를 만났다. 그 친구는 병원에서 외로운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 화가 나있는 사람들 등을 대상으로 상담해주고 얘기를 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미국으로 간 웅기의 얘기를 들어보니 생고생을 한 흔적이 느껴졌다. 웅기의 집에서 잠도 자고 배가 터질 때까지 먹기도 했다. 시카고에 있는 온갖 맛있는 음식은 웅기가 다 데려가줬다. 덕분에 배가 많이 나왔다. 난 사람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속 깊은 얘기를 어디에 잘 털어놓지 못하는데 웅기와 맥도날드에서 많은 얘기를 했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친구가 있다는게 감사하다.

엘에이에서는 카자흐스탄 봉사를 갔을 때 만났던 재형이를 만났다. 재형이를 만나 여행 중에 제일 먹고 싶었던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을 수 있었다. 덕분에 UCLA 캠퍼스에 가서 구경도 했다. 캠퍼스 전경이 아름다웠다. 차로 여기저기 데려다준 재형이가 참 고맙다.

얼바인과 샌디에고에서는 고모들과 사촌들을 만났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터라 교류가 많이 없어서 어색할 줄 알았는데 만나고보니 너무 반갑고 즐거웠다. 배터지게 먹고 신나게 놀았다. 역시 가족은 멀리 떨어져있어도 가족인가보다.

중국 칭따오에서부터 미국 샌디애고까지 70일을 여행했다. 샌디애고에서 멕시코로 넘어가고 싶었지만 돈도 없고 학교도 다녀야해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것이 참 많다. 느낀 것을 정리해서 책으로 한번 써보고 싶다.

이번 여행은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벌어지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여행하다가 만난 사람들이 내일 뭐해요? 하고 물어보면 "몰라요"라고 대답하는게 일상이 될 만큼 무계획적인 여행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무계획은 적재적소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너무 고맙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데 이 짧은 글에 모두 적지 못한게 아쉽다.

비행기를 타면서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있는 할아버지 두명을 보고 비즈니스 클래스로 인식했다. 사람이 자리를 만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번 여행은 사람이 여행을 만드는 여행이었다. 제 아무리 멋진 자연경관, 건축물, 미술작품이 있다한들, 사람의 인연 만큼 위대하고 아름다운 계획이 있을까?

여행하다가 만난 존경하는 형의 말이 생각난다. "야 너랑 나랑 만난 건 하나님이 만나게 한거야. 난 그렇게 믿는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우연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던 여행이겠지만,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인연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참 감사하다.

로스엔젤레스 공항에서 출발한지 꽤 오랜시간이 지났다. 아버지의 항공마일리지로 대한항공을 타고 가고 있는데 역시 기내식은 한국식이 좋다. 불이 꺼지고 비행기 내에도 밤이 찾아왔다. 이 밤이 지나가면 한국에 도착할 것이다.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한번 왔다가는 세상 돌아갈 때 후회없이 놀다가고 싶다. 어디 해외 혹은 국내로 놀러가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여행이 될 수 있고, 교회를 가는 것도 여행이 될 수 있다. 일상의 지루함을 바꿔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보고 싶다. 천상병 시인의 말 처럼 인생은 잠깐 왔다가는 짧은 소풍이 아닌가. 계속되는 여행이 이제 한국에서 시작된다. 내일이 기대된다. 인생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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