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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y 27. 2016

강화로 떠나는 성지순례

강화로 떠나는 성지순례코스를 짜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김포공항에서 바로 가는 버스가 배차간격이 굉장히 길어서 송정으로 왔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올 때 꼭 거쳐 나와야 했던 송정이기에 이 지겨운 곳에 다시 오지 않으려고 했지만 동생 학교 때문에 이쪽으로 이사를 오게 됐고 일 년을 넘게 이 곳에서 살았었다.

송정 근처에서 사는 동안 후배 해병들을 많이 보았다. 휴가를 나와 즐거운 표정으로 송정을 누비고 다니는 그들의 얼굴에서 내 과거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송정에 살면서도 군생활했던 곳으로 다시 가보진 않았다. 한 번쯤 가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굳이 시간을 내서 가기까지는 귀찮았다.

꿈만 같은 휴가가 끝나면 복귀를 해야 했다. 복귀를 하기 위해선 항상 타야 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그 버스는 삼천 번이었다. 삼천 번 버스를 타는 것은 나올 때는 행복이었지만 돌아갈 때는 아쉬움과 절망의 버스였다. 근데 강화 성지순례 코스를 짜기 위해서는 이 버스를 타야만 한다. 타기 싫어도 어쩔 수 있나 난 지금 자유다. 기분 좋게 버스를 탔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음료수를 한 캔 샀다. 기습상륙작전을 위한 훈련인 IBS 고무보트 훈련을 받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그때 수십대의 보트 중 1번 보트의 노를 저었는데 그 배에 우리 중대의 중대장이 탔다. 중대장은 자기 수통에 몰래 담아온 음료수를 우리에게 한 모금씩 나눠줬다. 한 여름 땡볕에 수시간 노를 젓는 훈련을 받은 1번 보트의 전우들은 음료수 한 모금에 행복했다. 천국에서 마시는 음료수의 맛은 이런 맛일까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같은 음료를 편의점에서 사서 마시는데 맛이 변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맛이 예전 같지가 않다. 마치 도루묵과 같다고 해야 할까.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는 평안도 의주 지방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길에 배가 고팠던 임금에게 한 어부가 생선을 가져와 바쳤다. 그 생선의 이름은 목어였지만 사람들은 이 생선을 묵어라고 불렀다. 오랜만에 싱싱한 생선을 먹은 선조는 생선 맛에 감탄하여 생선의 이름을 묵어에서 은어로 바꾸었다. 
일제의 침략이 끝난 후, 궁궐로 돌아온 선조는 은어 생각이 났고 수라상에는 은어가 올라갔다. 그러나 은어를 먹은 선조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예전만큼 맛이 없었던 것이다. 선조는 은어를 다시 목어로 바꾸라고 명했고, 목어는 도루 목어가 됐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도루묵이라고 불렀다. 내게 있어 그 음료는 도루묵 같은 것이었다.

임금이 피난을 갔던 의주는 구한말, 존 로스 목사님과 존 매킨타이어 목사님이 우리말로 된 최초의 성경을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팔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냥 나눠주면 변소에서 똥을 닦거나 아궁이의 땔감으로 쓰니, 소정의 금액을 받고 팔아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게 하고 성경을 보게 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의주 지방은 하늘님이 하나님으로 변한 곳이기도 하다. 의주 지방 사람들이 하늘(아래아)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 교회에서 굳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 선교사들의 역사는 선양, 단동, 의주를 거쳐 강화로 들어왔다. 예로부터 강화는 가장 북쪽에 있는 섬으로서 중국에서 외교 사절단이 뱃길로 들어올 때 거쳐오는 곳이었다. 남북이 전쟁으로 인해 갈라진 후에는 북파 공작원인 김신조가 이곳을 통해 들어올 정도로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곳은 북한이 눈에 보일 정도로 굉장히 가깝다.

강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데 어느덧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군 복무 한 곳으로 오줌도 다시 안 싸려고 했는데 결국엔 와버리고 말았다. 강화 땅에 도착했다.

강화터미널에서 18번 버스를 타고 교동도로 들어간다. 버스 안에 해병 일병 2명이 타서 얘기를 한다. "나 통장에 110만 원 있었는데 복귀할 때 확인해보니까 30만 원 남았더라." "뭘 그렇게 많이 썼어? 휴가 때 뭐했는데" 집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친구들이 마중 나와서 친구들 만나고 집 갈 때 버스 타기 귀찮아서 택시 타고 가고 홍대 클럽 가고 여자도 만나고 하니까 돈이 없다. 나 불효자식 인 것 같다." "내가 너보다 돈 더 썼어. 내가 진짜 불효자식이야." 자칭 불효자식끼리 대화를 하는데 부모님 생각하는 것 보면 그래도 효자들인 것 같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할머니 한분이 내 옆에 앉으셨다. 77세의 조홍래 할머니는 내게 계속 자식 자랑을 하셨다. 딸과 아들이 선생님과 의사,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며 했던 얘기를 수없이 반복하셨다. 나이가 들어도 부모님들은 자식 생각에 사나 보다. 할머니께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니, 얼굴이 밉다고 뒤로 가서 찍겠다는 할머니. 나이가 들어도 여자의 마음은 다 똑같나 보다.

딸 4명, 아들을 그 후에 났다. 당시에는 아들이 없으면 안 되는 때. 아들이 법대에 다니고 인천에서 법 공부. 의사 아들도 있다. 신랑도 법원에 다닌다. 딸은 선생님이다. 나 미워서 사진 멀리서 찍을 거라는 할머니. 여자의 마음은 다 똑같나 보다. 할머니라도. 자식 자랑하는 할머니. 자식 생각에 부모님들은 사나 보다. 내릴 때 몰랐는데 할아버지도 같이 타셨다. 할아버지와 대판 싸우신 듯 내릴 때가 되니 분위기가 불현듯 찾아온 가을바람처럼 서늘해진다.

강화군 하전면 고인돌 박물관 정류장에 대한 방송이 나오는데 홍의 교회 표지판이 보인다. 홍의 교회는 한날한시에 예수님을 믿었으니 한 형제라는 뜻으로 이름의 끝 자를 모두 '일' 자로 바꾼 교회이다.

홍의 교회를 지나 교동도로 들어가는데 검문소에 있는 헌병이 버스 안에 들어와 출입증을 요구한다. 없다고 말하니 주민등록증만 보여주고 통과시킨다. 강화도에서 교동도로 들어가는데 해병 몇 명 하고 나 밖에 버스에 남질 않았다. 나는 해병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첫 휴가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해병들이었다. 2017년도에 전역한다길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건넜지만 이제는 다리가 생겨서 배가 없어지고 다리로 다녀올 수 있는 교동도는 섬 넘어 섬이다. 대한민국 최북단에 있는 이 섬은 고요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익숙한 마을이 보이길래 일단 내렸다. 배차간격이 한 시간이 넘기 때문에 다음 버스는 못 탈 것을 각오했다. 내가 근무했던 '고구'라는 마을이었다. 논밭을 지나다 보니 철없는 소대장이 남의 논두렁에서 잡아온 생선을 달여다가 약을 해 먹던 것도 기억이 나고 초소에 몰래 가져가 먹은 건빵이 맛있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추억을 되새기며 걷고 있는데 길을 잃었다. 교동도가 생각보다 큰 탓에 길을 헤매다가 교회 하나를 발견했다. 교회의 이름은 고구리 교회. 잘못 들으면 고구려 교회로 들을 수 있는 교회에 찾아가니 사모님이 계셨다. 그리고 사모님은 목사님을 불러오셨다. 목사님이 가르쳐주신 방향으로 쭉 가니 교동 중앙교회가 나왔다. 교동 중앙교회 바로 옆에는 학교가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우기 전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었던 것이 비단 서울에 있는 정동의 얘기뿐만은 아니었다. 이곳 교동도에서도 마찬가지 었다.

교동 중앙교회를 갔다가 나오는데 해가 저문다. 집에서 너무 여유롭게 출발했나 보다. 정동 성지순례코스를 짤 때도 답사만 10번 이상, 그냥 지나다닌 건 셀 수도 없이 많이 다녔으니 강화 성지순례는 이 정도면 처음치고 괜찮다. 주어진 정보들만 나열하는 코스를 짜는 것은 쉬워도 코스를 내 안에 묵상하는 것은 어렵다. 어느새 금방 어둑어둑 해진 교동의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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