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준 Jun 08. 2016

망치고 실수하고 깨질 때 한걸음 발전한다.

뜨랑 낄로, 진정하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종로에서 분당으로 가는 빨간 버스를 탔다. 남산터널은 언제나 그랬듯 또 먹혔다. 천천히 가는 버스 창가 밖으로 보이는 노란색 나트륨 조명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군생활 중 주야간 전원 투입 때 끄고 켰던 나트륨 조명이 생각났다. 언젠가 근무를 서면서 일상이 그릴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느끼는 일상의 여유. 그걸 그리워하며 김포의 찬 바람을 맞았다. 학교를 다닐 때는 그게 행복인지 몰랐다. 군생활 중에 비로소 행복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를 지켜주던 학교라는 울타리가 사라지자 어딘가 소속되어야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 요즘 뭐하니?라고 했을 때 나 이거 하고 있어요라고 꽤나 안정감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것. 그러면서 동시에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것만 해도 되는 군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하지도 않았고 군대를 다시 가라 그러면 표정이 일그러질 테지만 소속감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해둘 수 있겠다. 후에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며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언젠가 그리워할 현재를 왜 나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 누군가 그랬듯이 젊음은 젊은이에게 맡기기엔 너무 소중한 것 같다.  

터널을 나와 삼성 블루스퀘어 홀을 지나는데 멋진 말이 쓰여있다. '망치고 실수하고 깨질 때 한걸음 발전한다.' 취업 한번 떨어진 것 가지고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아서 이제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

오늘 쾌남을 만났다. 남미에서 온 명환이 형이다. 예전에 용인 이형 페이스북에서 봤던 사람인데 페이스북을 통해서 만나게 됐다. 말 한마디 서로 안 해본 사인데 막상 만나보니 얘기가 잘 통했다. 시원시원한 말투와 분명해 보이는 그의 눈빛이 다시금 세상은 넓고 좋은 사람은 많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또 맛있는 설렁탕과 커피도 사주었다. 역시 좋은 사람이다. 명환이 형은 내게 "뜨랑 낄로"라고 말했다. 진정하라는 뜻의 스페인어였다. 마음을 차분히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래 맞다. 나는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서 남의 이야기가 들어올 공간이 없을 때, 고등학교 친구인 채진이가 내게 추천해준 책이 있었다. 책의 제목은 이병률의 '끌림'. 군대 선임이었던 요한이와 몇 명의 사람들이 글을 쓰는 방식이 이병률을 생각나게 한다고 했었지만, 누군지 몰라서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하고 얼버무렸던 기억이 났다.

가득 찼던 머릿속의 생각을 한껏 비우고 나니 책이 읽고 싶어 졌다. 그래서 교보문고 여행 서적 코너에 갔다.

서점 한구석 여행 코너는 언제나 즐겁다. 각자 꿈을 가슴에 품고 모여든 이 곳, 한 권의 책을 들고 마음은 벌써부터 그곳에 도착해있는 사람들. 책을 보며 쓰윽 웃는 미소, 꿈틀 거리는 눈썹, 뛰는 심장. 누구에겐 희망이, 누구에겐 추억이 되는 이곳에 오면 언제나 힘을 얻는다. 몇 권의 책을 보다가 이병률의 끌림이라는 책을 폈다. 페이지가 안 적혀있어 스르륵 읽는 도중 현실이라는 두꺼운 문 앞에 망설이고 있는 내게 쓴 것 같은 글이 보였다.

그러니 문 앞에 서서 이 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시간을 써버리면 안 된다. 그냥 설렘의 기운으로 힘껏 문을 열면 된다. 그때 쏟아지는 봄빛과 봄기운과 봄 햇살을 양팔 벌려 힘껏 껴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청춘이다. 그래서 청춘을 봄이라 한다. - 이병률의 '끌림' 중

계절은 겨울이라 말하는데 내 인생은 봄이 찾아왔다. 날이 추워도 몸이 따뜻할 수 있는 이유는 청춘이라는 봄이 내게 다가와서 그런가 보다.


작가의 이전글 낙오자의 변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