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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Sep 17. 2016

하품 없이 성공할 수 있는 무대는 없다.

공연은 그들의 예술이고 환상이지만 연습장이야말로 그들의 현실이지.


프랑스에 오면 프랑스 국민의 색깔이 너무 강해서 나도 모르게 움츠려 든다. 그동안 잘 안 되는 영어라도 자신감 있게 썼다. 근데 여기서는 뭔가 영어를 쓰면 죄책감이 든다. 프랑스를 여행하다 보면 아름다운 것이 아주 많다. 길을 걷다가 공원이 아름다워서 무턱대고 잔디밭에 앉았다. 아주 많은 것들이 프랑스에 살고 싶게 만들지만 가끔 프랑스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너네만 잘났어? 더럽게 잘난 체 하네'라고 말해보고 싶다. 


파리에 있는 파리바게트에서 소보루빵을 하나 샀다. 하나를 샀더니 아줌마가 장사 끝날 시간이라고 하나를 더 준다. 기분이 좋다. 소보루빵 두 개와 탄산수, 납작한 천도복숭아를 들고 공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자를 깔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한 커플이 돗자리를 깔고 열성적으로 키스를 한다. 엄청 부럽다. 그 옆에서는 럭비공 하나와 탱탱볼 하나를 갖고 공놀이를 한다. 그냥 공 주고받는 건데 되게 재밌어한다. 지나가는 중국인 아저씨가 키스하는 걸 보고 노골적으로 쳐다본다. '와 저 녀석들 난 왜 저러지 못했을까'라는 표정으로 넋을 놓고 본다. 중국인 아저씨 표정이 예술이다. 프랑스 사람처럼 입고 싶은데 후줄근한 옷들 뿐이라서 옷가게에 가서 빨간 티셔츠를 하나 샀다. 모자도 사려고 했는데 한 번에 너무 많이 사면 부담되니 조금씩 사기로 했다.     

이른 오후에는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되는 곳이자, 드가가 발레에 관심을 갖게 된 오페라 가르니에라는 장소에 갔다. 이곳은 오페라 공연장으로 시작해 지금은 오페라와 발레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다. 마감시간이 지난 후라 내부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기념품 샵을 통해 내부 출구 쪽만 구경했다.   

이곳에는 발레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 '에드가 드가'가 있었다. 그는 사실주의 화가였다. 그리는 대상이 세상의 어두운 면 일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림을 보면 테이블에 앉아있는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이 굉장히 대비가 된다. 남자는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 표정에서 '찝찝하지만 그래도 뭐 남들 다 하는 거니까 괜찮아'라는 표정이 묻어난다.     

반면에 인상적인 것은 여자의 표정이다. 아 진짜 너무 하기 싫은데 라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소녀의 표정은 슬픔과 절망 그 자체이다. 소녀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인생에 대한 깊은 저주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회의감에 빠져있을까. 아니면 그냥 오늘 저녁에 이 남자를 상대할 것을 생각하니 그냥 힘이 빠지는 것일까.


당시 돈이 많은 사람들은 발레 감상을 취미로 했다. 사실 발레 보는 것보다 그들에게 즐거웠던 것은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섹스를 하는 것이었다. 발레라는 고귀한 예술의 명목 아래 춤추고 있는 어린 소녀들을 데려다가 자신의 쾌락의 상대로 삼은 것이다. 드가는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옷을 벗고 둘이 섹스하는 장면보다 더 적나라하다. 표정에서 나오는 소녀의 짙은 어둠이 그림에서 나타난다. 지금이라고 달라진 건 없다. 한국에서도 연예인, 모델 데뷔를 빙자한 성추행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반복되는 것 같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있는 드가의 작품들


드가는 발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발레 하는 사람의 선이 좋다나 뭐라나. 나는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지 드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작품을 통해 그의 열정이 대단하다는 것은 느껴진다. 베토벤이 귀가 먹고도 작곡을 했듯이 드가는 눈이 멀어 그림을 못 그리자 손의 촉감으로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드가가 돈이 많아서 돈지랄을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 조각의 작업은 단순히 돈지랄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소녀의 포즈, 표정에서 드가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드가. 그의 모습에서 인생의 태도를 배운다.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념품 샵을 나오려는데 익숙한 작품이 보였다. 백조의 호수였다. 나는 몸치이기 때문에 춤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더군다나 클래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발레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그런데 친구 중에 발레를 하는 친구가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마련해주어서 발레가 낯설지 않았다.

발레 하는 친구인 재우는 중학생 때부터 스스로를 '포기를 모르는 남자'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만화 슬램덩크의 대사를 따온 것이라 또래의 많은 친구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곤 했는데, 이 말을 스스로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뻣뻣한 몸이 연습을 방해할 때도,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을 때도, 허리 부상을 당해서 재활 치료를 받을 때도 재우는 포기 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혼자서 스스로를 포기를 모르는 남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가 됐고 다른 사람들이 재우를 부를 때 포기를 모르는 남자라고 말한다.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도 포기를 몰랐던 사람 애드가 드가. 드가는 발레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연은 그들의 예술이고 환상이지만 연습장이야말로 그들의 현실이지. 하품과 피곤한 댄서들의 고통이 있거든" 나는 대단한 몸치이지만 내 주변에는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많다. 드가의 말을 듣고서 그들이 연습장에서 쏟은 땀과 눈물이 생각났다. 그리고 문득 존경스러워졌다.

우리의 삶 속에서의 연습장은 어디인가. 결과가 보이지 않는 지루함과 답답함에 하품이 저절로 나오는 곳. 매일의 열심히 만들어낸 피곤함과 그로 인한 고통이 있는 곳. 그 안에서 나 자신과 마주하여 당당하게 이겨내고 싶다. 하품과 피곤함 없이 성공할 수 있는 무대는 없다. 수천번의 연습이 아름다운 발레를 만들고, 수만 번의 작업이 위대한 조각을 만든다. 드가와 재우 생각을 하며 글을 쓰고 오페라 가르니에를 나왔다. 기타를 치는 사람, 서류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사람, 큰 배낭을 메고 여행을 하는 사람. 각자의 연습장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짧지 않은 여행으로 인해 약간은 지쳤던 내게 힘이 붙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다음 여행지로 힘차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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