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준 Sep 24. 2016

가뿐 호흡을 가다듬고 멈춰서는 것도 용기다.

여행은 우리의 인생과 닮았다.

누군가가 날 흔들면서 말했다. “티켓 보여주세요.” 나는 기차에 타고 있었고 역무원은 중국어로 내게 티켓 검사를 요청했다. 나는 티켓을 보여주었고 역무원은 확인 후에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해요.”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내린 기차역의 이름은 이면산. 예전 우리 말로는 고려문이라고 불렸다. 고려문은 말 그대로 고려로 향하는 문이다. 고려에서 중국으로 오가는 데는 이곳을 지나는 것이 필수였다. 실제로 이곳에는 3000가구의 고려인이 살 정도로 우리와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동북공정의 과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지우고 지금은 중국인들이 살고 있다. 고려 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책에서 본 옛 고려 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기찻길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는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 열하일기에 기록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교회사적으로는 66권으로 되어있는 한문성경을 한 권 혹은 낱권으로 나눠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냥 나눠주면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계란 하나, 감자 한 줄 정도의 돈을 받고 팔았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곳이 중국 정부의 역사왜곡으로 인하여 사라져 있다. 매우 속이 타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오긴 왔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디를 가야 할지 누구를 만나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면 뭐라도 있겠지 싶어서 찾아보는데 정말 인터넷에 나와있는 그 표지판 딱  하나밖에 남아 있는 게 없다. 기념비도 파괴되었다. 여행 중 가장 힘든 순간 중에 하나는 목표를 잃었을 때이다. 그리고  그때가 찾아왔다. 주변을 돌아보니 매일 열리는지 가끔 열리는지 모르겠지만 시장이 열렸다.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고 차들도 경적을 울린다. 양쪽으로 늘어선 시장에는 염소, 돼지, 물고기, 닭, 계란부터 시작해서 각종 채소와 농기구, 곡류, 빵, 튀김, 의류, 생활용품을 판다. 어느 한켠에서는 이빨을 뽑고 때우는 간이형 치과도 들어서 있다. 처음에는 너무 시끄럽고 낯선 풍경에 인상을 찌푸리게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기하고 재밌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물음에 치과의사(?) 한번 빼고는 모두 웃으면서 찍으라고 해주었다. 다만 여기 사람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즐겨하지 않는다. 나는 같은 동양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졌고 금방 지치게 되었는데 스코틀랜드라는 머나먼 곳에서 온 존 로스 선교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한글성경에 관한 리포트를 쓸 때 로스 선교사가 대단하다고 썼는데 직접 와보니까 그의 열정을 대단하다고 평가할 정도가 아니라 마음 깊이 존경스러워진다.

 한 여름의 중국은 굉장히 덥다. 더군다나 시골이라 마땅한 숙소나 사물함도 없기 때문에 짐까지 앞뒤로 매고 움직이는 터라 몸은 축 쳐지고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수십 분을 걷고 걸었다. 그러자 어떤 할머니가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할머니는 중국어로 내게 뭐라고 하는데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동기이자 형인 혁재 형한테 도움을 요청했고 혁재 형은 할머니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단동으로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까 단동으로 가라고 말씀해주셨다. 내가 어디선가 굉장히 멀리서 온 행색이라 불쌍해 보였나 보다. 하지만 나는 단동에서 변문진으로 온 것이고 지금은 심양으로 가야 한다. 친절을 베푼 할머니께 감사인사를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걸어보았다. 변문진은 대략 T자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왼쪽으로 갔던 발걸음을 오른쪽으로 돌려 보았다. 쭉 걸어가자 아까 들렸던 시장과 고려문 터가 나타났다. 나는 고려문 터를 지나서 쭉 걸어보았다.

 그러자 끝도 없이 펼쳐진 길이 나타났다. 양쪽에는 나무가 무성하게 서있었다. 연암 박지원과 존 로스, 맥킨타이어 선교사도 이곳을 걸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이곳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터벅터벅 걸으며 감정이입을 해보려 하는데 너무 덥고 짐이 무겁다. 그냥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괜히 촌동네와 가지고 이게 뭔 고생이람! 투덜거리면서 한참을 걸었을까. 벌써 지나온 길의 입구가 점으로 보일만큼 작아졌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왼쪽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있다. 나는 오솔길을 따라서 걸었다.

 눈 앞에는 산 하나가 보았다. 연암이 보고 존 로스 선교사가 보았던 바로 그 산이다. 시간도 남았겠다. 산 줄기에 한번 올라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쭉 걸어 올라갔다. 막다른 길이 나타났는데 그곳에는 웃통을 벗은 중국 아저씨 5명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저는 한국인입니다. 중국말을 못 합니다."라고 말하니까 아저씨가 내게 중국말로 뭐라 뭐라 했는데 그중에 '등산'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내가 "등산, 등산"이라고 말하자 아저씨는 또 "등산?"이라 고 말하고 길을 안내해주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뒤에 산자락을 조금 올랐는데 푸르른 동산이 하나 나타났다. 땀도 식힐 겸 잠시 쉬어가려던 차에 어디선가 메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리번거리면서 찾아보는데 또 어디선가 메에~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몇 초 뒤 수십 마리의 양과 염소 떼가 나타났다.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이람. 푸른 초원 위에 양치기와 양, 염소 떼가 그림 같이 펼쳐졌다. 순간 미소가 절로 들었다.

고려 문의 흔적을 보고 싶었는데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에 보지 못하고, 한글성경과 관련된 유적을 찾거나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유적은 모두 파괴되고 사람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루트가 잘 짜여진 관광이 아닌 여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막막해질 때가 꽤 있다. 그럴 때마다 좌절하고 포기해버리면 여행은 거기서 끝이다. 그러나 그때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서있으면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그곳의 공기가 느껴지고 고개를 올려다보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푸른 하늘이 보인다. 여행은 우리의 인생과 닮았다. 목표를 잃고 길을 헤맬 때, 발걸음을 멈추는 것. 그것이 인생에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가뿐 호흡을 가다듬고 멈춰서는 것도 용기다. 앞으로 가려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면 새로운 여행이 찾아온다.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고 상황들이 벌어지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조급해할 필요 없다. 나는 양들을 따라갔다. 양을 따라가다가 나무뿌리에 발목이 걸려 넘어졌다. 산 중턱으로 데굴데굴 구르다가 난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무서운 외국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