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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Sep 25. 2016

돈, 유명함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사랑에 속박받고 싶다.

며칠 전, 한 여행 플랫폼의 운영책임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서준 님의 여행 가치관과 글을 저희가 만드는 플랫폼에 담고 싶어 바로 메시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메일 주소 알려주시면 간략한 소개를 드리고 싶습니다. 꼭 뵙고 싶네요. 좋은 밤 되십시오! 박종경 드림.’


어리둥절한 나는 바로 답장을 했고 그렇게 나는 종경이 형과 홍대에서 만났다. 종경이 형은 내 목소리를 듣더니 생각했던 것 하고 다른 목소리라며 놀랐다. 글을 통해 상상해본 나는 섬세하고 가는 목소리였는데 실제로 만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하하 나 섬세해 보이는 사람이다.

카페에 들어가 누군가 사주면 먹어야지 생각했던 샤케 라또를 주문했다. 분주한 홍대의 분위기만큼 시끌벅적한 카페의 사람들을 피해 우리는 2층으로 향했다. 차가운 양철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앉아 평소처럼 나의 여행 아이템들을 꺼냈다. 폴라로이드 사진기도 꺼내고 블루투스 키보드도 꺼내면서 내가 다닌 여행 이야기들을 주욱 나열했다. 말하면서 나는 내심 걱정이 됐다. 이렇게 내 여행 이야기를 모두 해버리고 나면 텅 빈 마음속, 내 안에 찾아오는 공허함은 또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유명한 여행가들을 만나면서 짧은 시간 내에 나를 꾸역꾸역 설명하고 난 뒤에 찾아온 그 허전함이 떠오르면서 얘기를 적당히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종경 이형이 내게 말했다. “서준 씨는 잘 모르겠지만 알게 모르게 서준 씨 팬이 많아요. 서준 씨가 그동안 한 여행, 앞으로의 여행이 굉장히 기대가 됩니다.” 어디에 꼭꼭 숨어있는지 몰라도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위로가 됐다.

보통의 여행자들을 만나면 나를 짧게 소개해야 하기 때문에 대화의 패턴이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27개국을 여행 다닌 이서준이라고 합니다.”라고 하면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무슨 돈으로 여행 갔어요?, 저도 여행 가고 싶네요.” 등의 대화가 이어지다가 이내 시간이 지나면 서로 헤어진다. 나는 이런 대화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그런데 이런 대화를 짧게 짧게 하다 보면 금방 지친다. 했던 얘기를 계속하는 게 흡사 앵무새가 된 기분이기도 하다. 오늘도 마찬가지 었다. 카페에 앉아 내 소개를 할 때 지금까지 27개국을 다닌 이서준입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종경 이형은 내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얘기를 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과 여행이 있어요. 저는 요즘 사람들로부터 알려져서 유명한 사람과 그렇지 않지만 여행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참 재밌는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서준 씨의 얘기를 듣고 싶네요.” 나는 내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여행을 했는지 보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딜레마와 여행자의 한계, 실패했던 이야기들과 실망했던 마음들을 얘기했다. 
“솔직히 여행 가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을 보면 왜 유명한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질투하는 제 모습이 정말 싫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너 그렇게 여행해서 뭐하냐?’라고 비아냥 거릴 때 저는 결과로 ‘나 여행해서 이렇게 산다!’라고 보여주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는 게 현실이에요. 저는 돈과 유명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데 점점 돈과 유명세가 주는 자유로움 때문에 그것에 얽매이는 저를 보면서 너무 괴롭습니다.”

깊은 눈으로 내 얘기를 들어주는 형 때문이었을까. 아직은 다하지 못한 많은 얘기들이 아쉬움으로 남지 않았다. 그렇게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조만간 다시 보자는 약속과 함께 형과 헤어지고 이삭이와 만나러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마음이 가득 찼다. 난 분명히 나의 좋지 않은 모습들을 말했는데 좋기만 한 여행 얘기를 떠벌릴 때보다 훨씬 마음이 가득 차있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북적북적한 남대문 시장을 지났다. 지나가는데 샴푸가 보이길래 집들이 선물로 두 개를 사서 검은 비닐봉지에 넣었다. 올드보이에 나올 것 같은 허름한 입구를 지나 계단을 몇 층이고 올라갔다. 이곳이 맞나 싶어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이삭이. 그냥 걸어 올라가면서 계속해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4층쯤 가서 연락이 됐다. “이쪽으로 올라오세요!” 핸드폰 수화기에서 들리는 소리와 위 층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제법 가까웠다. 나는 그대로 걸어 올라갔다.

이삭이의 아지트에 들어서자 밖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아늑한 공간이 펼쳐졌다. 아직 정리가 덜된듯한 분주한 분위기였다. 이삭이는 내게 자신이 꾸민 것들을 자랑했다. “처음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는데 페인트칠도 하고 장판도 깔고 조명도 달았어요. 여기 있는 것들은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닥종이 인형이고요, 이 그림은 제가 미국 살 때 고른 그림이에요. 어릴 때 프랑스에 가서 고른 그림도 있어요.” 소품 하나, 물건 하나하나에 모두 이삭이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이삭이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직은 덜 정리돼서 분주했지만 이곳은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좁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자 남대문이 훤하게 보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밤이 되면 훨씬 예쁘다는 말에 일단은 밥을 먹으러 내려가기로 했다. 식사 전에 우리는 알파문고 본사에 들려서 전기테이프, 마루 보호패드 등의 물품들을 구입했다. 이삭이가 물품들을 구입하는 동안 나는 카운터 근처에서 이것저것 구경을 했는데 그때, 30대 정도로 보이는 직원이 이렇게 말을 했다. “야 나 결혼은 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직원이 대답했다. “야 담배나 피우러 가자.”
알파문고를 나와 식당에 들어가는데 이삭이가 이런 말을 했다. “좋아하는 걸 하면 나머진 따라오는 것 같아요.” 카자흐스탄에 같이 갔던 시원이 형도 똑같은 말을 했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 나머진 따라온다.’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이 말은 좋아하는걸 하지만 아무것도 따라오지 않는 사람과 하고 싶지 않은걸 억지로 하면서 보상을 받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아직은 너의 때가 아니야!’라는 식의 희망고문은 오히려 더 힘이 빠지게 한다. 내게 좋아하는 것을 하면 나머지가 따라온다는 얘기를 하는 이삭이의 희망찬 눈을 보니 더욱 절망스러웠다. 그런데 절망 좀 하면 어떤가. 정직한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다.

우리는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이삭이에게도 마찬가지로 내 실패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다가 외국인 가이드, 국내 성지순례 가이드를 했던 얘기가 나왔다.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모으는 게 어려워서 시들시들해진 가이드. 지속적인 수익창출 없이 무턱대고 계속 하기엔 너무 지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삭이는 이 얘기를 듣더니, “이거 괜찮은데요? 계속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라고 얘기를 했다.
가이드도 부진하고 책 내려던 것도 잘 안되던 내게 요즘 드는 생각은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세계여행을 다녀오면 무언가 내게 생기겠지!라는 허영심 가득한 내 마음. 오늘 이삭이를 만나러 온 것도 사실은 어떤 테마로 세계여행을 떠나야 할까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삭이와 얘기를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다 하는 거라서 나도 따라 하는 것이 아닐까? 여행 커뮤니티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여행을 간다고 하니까 마땅히 할 것도 없고 나도 남들처럼 여행이나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삭이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여행마저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따라서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진정 여행이 가고 싶은 것인가? 아님 유명해진 사람들을 흉내내고 싶은 것인가?

나의 낯빛을 거울에 비춰보고 본연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삭이 아지트 옥상에서는 남대문의 야경이 보인다. 이삭이는 그곳에서 싸인 수집가답게 내게 싸인을 부탁했다. 그리고 싸인과 함께 내 좌우명을 써달라고 했다. 매번 쓸 때마다 다른 좌우명을 고민하다 보니 옥상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삭이는 침묵을 깨고 내게 말했다. 형, 좌우명 생각이 안 나면 그냥 마음속에 있는 말을 써도 좋아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썼다.


돈, 유명함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사랑에 속박받고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PC방에 들려서 글을 정리했다. 피시방을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니 화려한 네온사인과 오늘따라 짙은 밤하늘. 어쩌면 나는 주변의 네온사인에 가려진 밤하늘의 별들을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쿵쾅거리는 음악과 함께 화려하게 빛나는 네온사인에서 벗어나 적막한 기차역에서 바라보았던 빛나는 별의 소리를 듣고 싶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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