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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Sep 26. 2016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나는 그곳에 돈 대신에 행복을 걸어놓고 왔다. 

새벽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안나푸르나 산봉우리를 보고 싶어서였다. 일찍 일어난 새는 벌레를 잡는다고 했던가, 일찍 일어난 나는 맑은 하늘에 펼쳐져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볼 수 있었다. 산맥은 20분 정도 후에 구름으로 다시 모습을 감췄다. 부끄러움이 많아 보였다.

잃어버린 안경 탓에 안경점에서 안경을 맞추었다. 안경을 맞추러 갔는데 시력검사표가 없었다. 안경을 파는 아저씨는 내게 안경을 하나 주더니 저기 저 산봉우리가 보이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안 보여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다른 안경을 보여주더니 "이번엔 보여?"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잘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건 이제부터 네꺼야!" 네팔 현지 물가가 싼 탓인지 안경도 쌌다.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정직한 네팔 사람들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했다. 나는 한국 돈 3만 원에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안경을 새로 맞추고 다시 어제 갔던 한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학교로 가는 차편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원래 있던 일행들에게 인사를 하고 마트에서 과자를 샀다. 학생들에게 나눠줄 과자를 사고 보니 왠지 마음이 흡족했다. 흡족한 마음으로 우리는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도착한 그곳에는 수녀복을 입은 수녀님이 계셨다. 그곳은 네팔 정부에서 난민촌으로 지정해 지진이나 다른 이유로 인한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수녀님은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며 환영해주셨다. 

아이들은 주중에는 교육과정에 따른 공부를, 금요일에는 자유시간을 갖는데 이번에는 음악시간을 갖고 있었다. 교실(나름 강당)은 판자로 만든 아주 허름한 곳이었고 가운데 놓인 유리 테라스를 통해 교실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주 더운 날씨에  60명가량의 학생과 그를 지도하는 선생님들, 그리고 우리 일행이 같이 있자니 교실이 금방 찜통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빛은 덥기 때문에 짜증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교회학교의 어린이들처럼 뒤에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수업을 듣기도 했다. 우리를 환영하는 인사를 하고 수녀님은 아이들과 함께 '목마른 사슴'이라는 찬양을 불렀다. 한국어로, 네팔어로, 영어로 부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음 한국교회의 선교사님들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미래가 기대됐다.

수녀님이 운영하는 이 학교는 처음에 학교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학교가 있기 전에 이곳 난민촌에서 의료선교를 먼저 시작하였다. 이동식 병원과 같은 개념으로 네팔에 있는 상류층 사람들을 고치던 사람들이 네팔의 난민촌으로 와서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고 돌보아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수녀님은 의료선교를 하시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드셨다고 한다. ‘사람들의 몸을 고쳐주는 것은 그때뿐이지만, 교육은 사람들의 의식을 계몽시키고 그 사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겠구나.’ 이후 수녀님은 자그마한 창고에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셨다. 그리하여 지금은 자그마한 강당과 시멘트와 판자로 만든 6개 정도 되는 교실 안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신다.

나는 여행을 다니면서 즉석사진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한 가지 주제로 여러 가지 나라와 장소를 다니면서 무언가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필름의 부피 때문에 많은 양의 필름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작품을 만드는 데에도 부족한 양이었다. 그런데 문득 난민촌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자신의 사진 한 장을 갖고 잊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어떤 작품을 만들던 이 보다 귀한 작품이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작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주고 널리 이롭게 하는 역할을 갖지 않았던가. 나는 내게 있는 즉석사진 필름을 난민촌에서 대부분 사용했다. 사진을 찍어줄 때마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신기하게 쳐다보는 눈, 낯선 여행객을 경계하는 눈, 쑥스러움을 타는 눈, 장난기가 가득한 눈, 한껏 흥분되어있는 눈들이 한 명 한 명 나를 바라보았다. 순수한 눈, 더럽혀진 발, 사랑스러운 모습을 가진 그들은 모두 천사들이었다. 사진 찍는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동네 아이들이 학교로 몰려들었다. 필름이 충분하여 다행히도 그들 모두를 찍어줄 수 있었다. 사진을 찍는 장소는 수십 명이 한 공간에 있다 보니 매우 더웠다. 카메라가 땀으로 젖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곳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즉석사진 장사를 하면서 장사가 잘될 때 주머니에 가득 찬 돈을 보고 기뻐했었다. 세상에 돈을 버는 기쁨보다 큰 기쁨이 있을까 싶었다. 

근데 이번 즉석사진 카메라를 찍어주면서 느낀 것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던 때보다도 이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줄 때가 훨씬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사랑은 돈이 줄 수 없는 행복을 가졌다. 그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찍은 사진들은 학교 강당 벽에 걸린다고 했다. 아이들이 각자 가져가는 것보다는 학교에 한 번이라도 더 와서 자신의 사진을 볼 수 있게 한다는 취지였다. 다음에 네팔에 왔을 때는 그 사진들을 보러 와야겠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나와 경수는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정전이 됐다. 당황한 표정으로 숙소 주인을 바라보니 촛불을 켜주면서 “괜찮아.”라고 말해줬다. 하늘에는 천둥번개가 쳤다. 그러다가 번쩍 하는 불빛과 함께 벼락이 나에게 떨어졌다. 그렇게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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