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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Sep 30. 2016

젊은 날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집에 돌아와서 그동안 했던 것을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난 뭐했길래 나한테 밥 사 먹을 돈 한 푼이 없는 걸까. 돈이 없으니 인생이 흥미진진하긴 한데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니 실패스러운 게 너무 많았다. 그러나 젊은 날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었다. 

미국 여행을 할 때, 워싱턴 공항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데 친구 한 명이 내게 물었다. "야 넌 대학교 4년 동안 뭐했냐?" 곰곰이 생각해보니 1-2학년 때 잘한 건 연애한 거밖에 없었다.


1-2학년 때는 교회에서 일을 했었는데 딱히 교회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단순노동이었다. 주보를 복사하고 파일 문서를 정리하는 정도의 일. 사실 내가 할 일이 없었다. 내가 무능력해서 이기도 했겠지만 청년부에는 각자의 전문분야가 확실했기 때문에 일개 신학생인 나는 그저 교육프로그램의 명찰을 오려서 만든다던가 과자를 사서 세팅해놓는 정도의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서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 느꼈다.

2년 동안 그렇게 금토일 주말 시간을 교회에서 보냈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는 내가 할 일이 많았다. 각 계급별로 해야 할 일들이 정확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할 일이 정해져 있었다. 선임과 후임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동기와의 일 협력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경험을 했다. 군대를 조금 일찍 올걸 싶었다. 아무런 할 일이 없을 때보다 바쁘게 뭔가를 하고 보람을 느끼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이 병 때는 강제적으로 혼나면서 배웠다. 군대라는 조직문화상 어쩔 수 없다. 처음에는 ㅈ같았지만 그런 경험들은 나중에 상병이나 병장이 돼서는 내 밑의 사람들을 관리하는 데에 밑천이 됐다. 군대는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의 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군대를 빼고 나머지 대학생활 1년 반은 무엇을 했을까? 여행을 갔다. 여행을 갔다 와서 궁금한 것들을 정리하고 다시 여행을 하고 궁금한 게 생기면 적어놨다가 공부하는 식으로 학교를 다녔다.

터키를 여행하다가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야 이레네라는 곳을 발견을 했는데 이곳에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라는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분명 2학년 교회사 시간에 배웠는데 기억이 안 난다. 그러면 학교에 돌아와서 후스토 곤잘레스의 초대교회사라는 교과서 같은 책을 찾아본다. 그리고 학교에서 기독교 사상사라는 수업을 수강한다. 수업을 듣다 보면 또 궁금한 게 생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말고도 중요한 공의회가 많단다. 그리고 그 공의회의 많은 것들이 '삼위일체'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삼위일체를 공부하다 보니 머리가 아프다. 회의감도 든다. 사람들이 치고받고 싸우면서 자기들의 정치싸움으로 만든 개념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회의감이 몰려온다. 고민의 고민을 하고 기도를 하는데 답이 나오질 않는다. 실제로 그곳에 가서 그 개념이 탄생하게 된 문화를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수많은 논란의 첫 번째 머리 되는 공의회가 터키의 이즈니크라는 곳에서 열렸던 니케아 공의회란다. 그렇다면 이제 터키로 떠난다. 이즈니크에 오는 길에 니케아 공의회의 두 핵심인물인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오스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그때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지금처럼 원활하지 않았을 텐데 그들은 이 모든 고초를 감수하면서도 그들의 입장을 얘기하러 이 험난한 여정을 계속한다. 배를 타고 가다 보니 정치적인 싸움을 하러 가는 느낌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얘기하러 가는 느낌이 든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그들이 사용했던 어투이다. 학교에 돌아가면 그리스어를 공부해서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가 논쟁했던 원문을 읽어보고 싶다.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만나도 말의 뉘앙스가 달라서 생기는 오해가 있는데 그들이라고 안 그랬겠는가? 원문의 뉘앙스를 느껴봐야겠다.

이런 식으로 여행과 공부를 엮어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공부가 해야 할 것에서 하고 싶은 것으로 바뀌게 됐다. 그렇게 공부하니 2학년 때 성적은 평점 2.9였는데 3학년 마지막 학기 평점은 3.9가 나왔다. 내 평생 생각도 못해본 장학금까지 받게 됐다. 공부가 재밌을 수도 있는 거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이게 누가 보기엔 공부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보기엔 그냥 놀이 같은 수준을 놓고 공부하는 척 엄청 나댄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공부하던 방법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괴테가 했던 그랜드 투어의 개념과 비슷하다. 그랜드 투어는 17세기 유럽의 부자들의 자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개념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견문을 넓히고 사람들과 만나며 인맥을 쌓으며 스승과 함께 다니고 공부를 함으로써 일반 여행이 아니라 학문하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내게 같이 다니는 한 명의 스승은 없지만 여행 다니면서 느낀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내게는 스승이라는 것이다. 네팔 수녀원에서 만난 어린아이가 내게는 인생의 스승이고, 인도에서 아버지의 얼음 수레를 밀던 소년이 내게 깨달음을 준 스승이다. 50년 전 광야에서 성경을 발견했던 베두윈 목동이 나의 스승이고, 100년 전 성경을 번역하던 존 로스 목사님 또한 나의 스승이다. 파리에서 만난 누나와 뉴욕에서 만난 형의 애정 어린 조언도 모두 나의 스승이다. 스승은 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더운 날 이마를 스치는 바람과 기차역에 모여있는 개미까지도 내 스승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부족함 없는 그랜드 투어를 하고 있다.

대학교 4년 중 2년은 방황했고 나머지 1년 반은 하고 싶은 것을 분명히 하며 보람차게 다녔다. 이제 한 학기가 남았다. 한 학기 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학교에 돌아가서 공부를 하려고 보니 예전에는 가슴이 뛰고 기대가 됐는데 이젠 그렇지가 않다. 습관적으로 달려가는 관성에 의해 달려가는 것 같다. 목적지도 모르는 체 앞사람이 가니까 그냥 절벽을 향해 뛰어가는 스프링복과 같다. 결국 이렇게 가면 죽고 말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고 싶다. 여행을 하면 살아있음을 느끼듯이 내가 하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일을 하고 싶다. 젊은 날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그저 목적 없이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만큼 내 인생에 대해서 미안한 것도 없다. 내 인생에 솔직해지자. 뛰는 가슴에 진솔하게 묻고 땀 흘려 일해서 젊음을 채우자. 먼 훗날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후회 없이 좋았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은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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