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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Oct 02. 2016

어머니는 낡은 차를 타고 다니셨다.

라스베이거스 위에서 생각난 어머니의 사랑

“삐삐삑 띠로리” 집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곤에 지친듯한 얼굴로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하루 종일 서 계셨는지 발이 퉁퉁 부으셨다. “야 서준아 이리 와서 엄마 발 좀 주물러 줘라” “아 무슨 발이야. 셀프로 좀 주무르셔” 나는 귀찮았다. 몇 번을 거절했는데 어머니께서 또 말씀하셨다. “이누마 엄마 발 주무르는게 그렇게 힘드냐?” 순간 나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차를 타고 가다 보니 여러 가지 색깔의 차가 보인다. 검은색 흰색, 빨간색, 노란색, 회색, 은색 등등. 아직 있지도 않은 차 괜히 무슨 색깔 차를 살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차를 살 때 오래 탈 것을 대비해서 색깔을 무난하게 고르는 것이 날 것 같다. 그동안 우리 집 차는 무슨 색깔이었을까 생각해보다가 세피아 색의 세피아를 탔던 것이 기억났다. 당시에 평범하지 않은 색깔의 차였다. 난 그 차 색깔이 좋았다. 그냥 살 때 자기가 사고 싶은 차 색깔을 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세피아를 타고 다니던 기억이 듬성듬성 난다. 세피아를 타고 겨울에 고기리를 가서 얼음낚시를 했던 기억, 서울역 근처 빌라에 살 때 세피아가 유치원 앞에 주차돼있었던 기억.

그러다가 문득 중학생 때였나 구미동 무지개마을 신한 건영아파트에 살 때 생각이 났다. 그때 xx무어 스쿨이라는 영어학원을 다녔었는데 뭐 대충 미국인지 영국인지에서 현지인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던 사람 원어민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치는 시스템이었다. 그중 미란다 선생님과 레슬리 선생님이 있었는데 한창 성적인 호기심이 왕성할 때 미란다 선생님의 엉덩이는 왜 이렇게 큰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풍만한 하체는 서양인이 가진 종특인 것 같다. xxxx 스쿨이라는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기억나는 것은 인터넷 포커를 하던 원장 선생님의 이름과 내 이름이 같은 마이클이라는 것이었고, 원장 선생님의 와이프는 우리에게 저녁 끼니때마다 라면을 끓여주며 이 라면은 다른 라면과 차별화된 파워라면이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또 try를 발음할 때 트라이가 아니라 츄라이로 발음하는 것이라며 이덕화 아저씨의 발음이 잘못됐음을 지적했던 것이 기억났다.

딱딱한 영어문법과 지겨운 단어 외우기가 너무 싫었다. 하루는 내가 너무 문법을 못해서 원장 선생님이 1:1 특강을 했었는데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원장 선생님이 뭐라고 했다. 나는 나도 잘하고 싶은데 안된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글썽였던 것이 기억난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가서 해질 녘 혹은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왔다. 학원에 가는 시간보다 학원에서 나와서 피카츄 돈가스를 먹는 시간이 백만 배 행복했다. 셔틀버스를 타는 순간 집에 갈 수 있다는 기쁨이 학원에서의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주었다.

xx무어스 쿨이 나중 돼서 무슨 이유였는지 몰라도 학원이 없어졌다. 학원이 없어지고 갈 곳을 잃은 원어민 강사들은 당시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용인시 수지구에서 엔조이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부모님은 실직한 원어민 강사 중에 레슬리 선생님을 우리 집에 초대해서 동생과 나를 가르치도록 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에 굉장히 많은 돈을 레슬리 선생님에게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어학원에 줬던 돈도 굉장히 많았는데 원어민 강사 직접 강의하는 프리미엄이 붙어서 돈을 더 많이 주었던 것 같다.

세피아에 관한 기억을 더듬다가 레슬리 선생님하고 율동공원에 가서 레슬리 선생님을 대접했던 것이 기억났다. 분당 율동공원에 가면 먹자골목으로 가는 길에 약간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유치원 때부터 타던 세피아가 낡아서 그 언덕에서 멈췄던 것이 기억났다. 정말 낮은 언덕, 언덕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언덕이었는데 차가 낡아서 가던 도중에 서버렸다.

부모님은 가다가 저버리는 낡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치시려고 집에 원어민을 불러서 가르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러셨냐고, 왜 그렇게 미련하게 하셨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거는 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이 컸다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집안 형편이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부모님께서는 문방구 앞에 있는 100원짜리 오락기 빼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빚을 내서라도 시켜 주셨다. 참 감사하다.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가는 길에 해가 저문다. 이제 여행 막바지가 되어서 돌아갈 때가 되니 보고 싶은 사람들 얼굴이 떠오른다. 가장 보고 싶은 것은 가족이다. 정작 만나면 반가운 티를 감추게 될 테지만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잘해야겠다. 이렇게 다짐하고도 막상 집에 돌아오니 내게 여전히 부모님은 귀찮은 존재였다. 이런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나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어머니의 발을 주물러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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