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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Oct 03. 2016

여행하는 사람은 자유에 지쳐 쓰러진다.

기타 가방에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겼다. 그리고 주머니 속엔 동묘 앞 헌책방에서 산 시집 한 권을 넣었다. 길거리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나면 단순한 게임을 했는데도 머리 속이 멍한데 시집을 읽다 보면 머리가 맑아진다.  

여의도 벚꽃축제는 오늘도 분주하다. 사랑을 나누는 연인, 유모차를 타고 나온 아이, 교복을 입고 소풍을 나온 학생들. 나는 즉석사진기를 삼각대에 설치하고 보도블록에 위에 걸터앉았다. 흩날리는 벚꽃 잎을 맞으며 길에서 읽던 시집을 마저 꺼내 읽었다. 그러던 와중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물었다. "사진 찍어주시는 거예요?"

30살의 커플이었다. 재즈 피아노를 하는 남자의 꿈을 물어보았더니 지루한 어른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지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제일 싫은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이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손님이 다녀가고 얼마 안 있어 훈훈한 남녀 커플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했다. 남자는 30대 초반의 파일럿이었고 여자는 20대 후반의 스튜어디스였다. 그들에게 나는 질문해보았다. "앞으로 하고 싶으신 일이나 꿈이 있으세요?" 그러자 파일럿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대답했다. "지금 결혼한 지 꽤 됐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요. 아이를 갖고 싶어요. 그리고 제 꿈은......"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얘기를 이어갔다. "제 꿈은 파일럿이 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지금 파일럿이 됐습니다. 꿈을 이루고 나서 꿈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사실 요즘 조금 마음이 공허해요. 파일럿이 되기 전에는 파일럿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면서 살아가는 날들이 두근거리고 벅찼는데 그 꿈을 이루고 나니 사는 대로 그냥 살고 있네요. 저도 꿈을 꾸며 살고 싶습니다. 그게 꿈이에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나눠주는 종이에는 여러 가지 인적사항과 가족의 직업, 그리고 나의 꿈을 쓰는 칸이 있었다. 꿈을 쓰는 항목에는 참 많은 아이들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썼다. 대통령, 변호사, 의사, 판사, 검사, 파일럿, CEO.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꿈이 아니라 부모의 꿈을 쓰는 것 같았다. 내 아이는 돈도 많이 벌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부모의 꿈. 그러한 꿈들은 많은 경우 직업으로 나타났다.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2위가 연예인이고 1위는 건물주라고 대답한다. 돈도 많이 벌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직업이 연예인이고 건물주이기 때문이다. 직업을 꿈으로 삼는 사람이 직업을 가졌을 경우 다가오는 것은 잠깐의 성취감과 그 후에 찾아오는 공허함이다. 우리는 직업을 꿈으로 삼기보단,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꿈꿀 필요가 있다.

파일럿을 하고 있는 남자가 내게 말했다. "참 좋은 것 같아요. 젊은 시절 하고 싶은걸 이렇게 해보면서 살아가는 게 멋지네요. 직업을 갖게 되고 가정을 꾸리면 책임져야 할 것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요. 물론 책임져야 하는 것에서 오는 행복은 커요. 그런데 혼자일 때, 젊을 때만 찾을 수 있는 행복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마음대로 여행도 다니고 해보고 싶은걸 마음껏 해볼 수 있는 그 시기가 부럽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저는 돈 걱정 안 하시고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벚꽃놀이 오시는 조종사님이 훨씬 부럽습니다." 우리는 서로 웃었고 옆에 있던 스튜어디스 아내가 가장 크게 웃었다.


작년 여름, 중국과 인도를 지나 네팔 여행을 마치고 터키로 넘어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 한참 한국음식이 먹고 싶었다. 그리고 일상에서의 소중한 것들이 떠오르며 집이 그리워졌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빈 들녘의 바람이 그립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흘러가던 여행이 그립기만 하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여행하는 사람은 자유에 지쳐 쓰러진다.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하고 응원하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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