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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Oct 28. 2016

꽃보다 아름다운 것

광주를 떠나 보성으로 향했다. 역 근처에서 한 할머니가 몸빼바지를 사시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따라 샀다. 타고난 길치인 나는 차 타고 8분 거리를 헤매다가 4시간에 걸쳐서 도착했다. 캄캄한 밤, 달이 유난히도 가깝게 보였다. 사진을 아무리 찍어도 나오지 않기에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평소의 달이 나와 한효주의 거리 정도라면 어제의 달은 원빈과 이나영의 거리 정도였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됐다.

짐을 맡기러 보성 터미널로 갔는데 짐 보관소가 없다. 가까운 편의점에 들려서 정중하게 짐을 부탁했더니 감사하게도 맡아주었다. 출출한 배를 달래려 컵라면에 흰 우유 하나를 먹고 터미널로 향했는데 외국인 3명이 나를 보고 한국어로 “녹차, 녹차!”라고 외친다. “녹차 밭에 가려고? 나도 지금 가는 길인데 우리 1분밖에 안 남았어. 빨리 표 사고 나를 따라와!” “엥 너 영어 하네? 고마워” 그녀들의 이름은 잔나, 겔르, 린디였다. 각각 네덜란드와 벨기에 사람이었다.  

“기사님 녹차밭 가려면 얼마나 가야 해요?” 기사님께 여쭤보자 기사님은 “앉아있어. 내가 말해줄게.”라고 대답하셨다. 펼쳐진 논밭을 얼마나 봤을까. 우리는 대한다원 역에 도착했고 그곳에 내렸다. 버스정류장에는 나와 외국인 친구 3명 그리고 한 명의 외국인이 또 내렸다. 그녀의 이름은 인발, 이스라엘에서 한국으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내가 히브리어로 간단히 인사하고 기도문을 읊었더니 그녀가 놀랐다. “아니 너 어떻게 히브리어를 할 줄 알아?” 나는 그냥 웃었다.

보성 녹차 밭이라고 해서 그냥 좀 높은 밭이겠거니 했는데 이건 뭐 걷다 보니 밭이 아니라 산이다. 네덜란드에서 온 친구는 녹차를 먼저 마시고 올라가겠다며 카페로 들어갔다.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까지 올라가다가 한 아주머니는 “아이고 할아버지!”라고 하면서 중간에 주저앉았다. 외국인 친구들은 북유럽과 중동 피지컬이라 그런지 거침없이 올라간다. 정상에 올라서 흐르는 땀을 닦고 레몬 녹차를 마셨다. “그거 뭐야?” 관심 있게 물어보는 친구에게 대답해줬다. “이거 녹찬데 레몬 하고 섞여있는 거야. 마셔볼래?” 그녀는 목이 말랐는지 벌컥벌컥 마셨다.

우리는 내려오면서 얘기를 나눴다. 이스라엘에서 온 인발은 변호사였고 네덜란드에서 온 잔나는 영화 촬영장 세트를 만드는 일을 했다. 한국 여행 중이라는 그들은 용케도 설악산, 불국사들을 찾아다녔다. 내려와서 우리는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것도 달아. 한국 사람들은 달고 맵고 짠 음식들을 주로 먹는 것 같아. 얼마 전에 요플레를 먹었는데 요플레도 달더라고. 그래서 한국이 난 좋아.” 이어서 겔르가 나에게 물었다. “녹차탕에서 찜질을 하려면 어디로 가야 해?” 길을 찾아보니 교통편이 매우 불편했다. 실망한 그녀들이 내게 또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나는 대답했다. “그러면 담양에 죽녹원을 가봐. 거기 가면 대나무 숲이 있는데 가볼만해” 그렇게 그들은 담양으로 향했고 나는 녹차를 한 잔 시켜서 다시 한번 주욱 둘러보았다.

그런데 웬 아기가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자기 몸의 절반 정도 되는 큰 계단을 오르면서 아이는 최선을 다했다. 뒤에서 지켜보는 아버지는 아이가 다칠까 염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아이가 도전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몇 계단을 올랐을까. 넘어지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던 아이는 더 이상 계단을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한 아이의 모습에 가족들도 뿌듯해했고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미소를 지었다.

녹차 밭을 구경하는데 녹차 곳곳에 꽃이 피어있다. 녹차를 파시는 분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녹차에도 꽃이 피네요?” 그러자 직원 분이 대답했다. “네 녹차도 꽃이 핍니다. 그런데 녹차 꽃을 보통 가공하지 않아요. 녹차는 주로 어린잎을 사용해 만든답니다. 그래서 녹차의 제철은 어린잎이 솟아 나올 때입니다.”

이미 이뤄낸 꿈들보다 새벽이슬을 견디고 머금은 청춘이 아름다울 수 있듯이 치열하게 분투하는 어린잎이 때로는 피어난 꽃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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