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준 Oct 23. 2016

태풍이 지나간 바다는 유독 더 아름답다.

약속 없는 부산은 꽤나 심심하다. 혼자서 가방을 메고 서면을 돌아다니니 홍대와 강남의 사이 같은 느낌의 술집들이 여기저기 있다. 한두 방울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다시 숙소.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게으른 오전 햇살을 맞았을 때는 이미 태풍이 지나간 상태.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몇 년 전 친구들과 먹었던 돼지국밥을 먹으러 갔다. 학교를 다니는 친구, 직장을 다니는 친구,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친구들에 비해 너무 뒤처진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은 돼지국밥과 함께 말아먹었다.

바로 그때, 티브이에서 속보가 나온다. 내가 묵고 있던 숙소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태풍으로 인해 건물이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해운대 쪽은 더 심각했다. 길거리에서 숭어가 잡힌다는 얘기가 들렸다. 오늘 저녁은 숭어 매운탕을 먹어야겠다. 나는 숭어를 잡으러 해운대로 출발했다. 

나는 사투리 성애자이다. 사투리를 쓰는 여자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행복하다. 변태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좋은 걸 어떡해. 그런데 5년 전 왔던 부산하고는 달리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얘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서로 대화하기보다는 각자 스마트폰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슬펐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과연 지하철이 운행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운행을 하지 않는다면 중간에 내려서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무 문제없이 지하철은 도착했고 도착한 해운대의 풍경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평화로웠다. 뉴스가 나를 속인 것인가. 마치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닷가를 향해 얼마나 걸었을까. 해안가에 뒹구는 컨테이너 박스와 부서진 잔재들을 보고 태풍의 흔적을 실감했다.  

숭어 따윈 이미 집에 돌아가고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기타를 치며 연주하는 사람과 평화롭게 뛰어노는 아이들, 그리고 약간 성난 파도였다.

 해안가를 따라 걷다 보니 노란색 구조물이 보였다. 내가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니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아저씨가 와서 얘기한다. "쩌어쪽에 점 하나 보이죠. 이게 원래 저거랑 같이 평행을 이루고 경계선을 만드는 건데 저게 만들어진지 30년 만에 처음으로 뽑혀서 여기까지 떠밀려온 거예요. 태풍이 엄청났죠. 사람이 정해 놓은 건 어쩔 수가 없어." 아저씨가 떠나고 나서 노란색 구조물의 바닥을 보자 덕지덕지 붙어서 뭔가 썩은 내가 나는 것이 보였다. 악취가 진동을 하고 벌레들이 꼬이는 것으로 보아 30년 동안 박혀서 생긴 것 같았다.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나쁜 고집이 이런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야.'라고 규정짓고 살아온 무언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서 썩고 있겠다는 생각. 결국 크게 불고야 말 태풍에 뿌리째 뽑히겠지만 그전에 알고 대처할 수 있다면.

태풍이 가고 난 후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 졌다. 모진 태풍에 많은 것들이 부서지고 그 잔해들이 여전히 남아 바닷가에 뒹굴었지만 애석하게도 바다는, 그리고 하늘은 아름다웠다. 모진 태풍이 와도 묵묵히 견뎌내자. 태풍이 지나간 후에는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바다가 나를 기다릴 테니.

작가의 이전글 아무도 널 알아주지 않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