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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29. 2016

"야! 저리 꺼지라니까 왜 또 왔어!?"

안되면 될 때까지

"야! 저리 꺼지라니까 왜 또 왔어!?"


 어쩔 수 없이 다시 군부대 옆 주차장으로 찾아온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주차장 관리 요원 아저씨의 짜증 섞인 말이었다. 도로변에서 폴라로이드 사진 장사를 해보려고 했지만, 그 누구도 지나가는 차를 멈춰 세우고 내려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일로 오지 말랬지? 이걸 확!" 아저씨는 우리에게 격렬한 욕과 제스처를 취하며 우리를 쫓아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저씨 저희가 학비도 벌고 여행자금을 모으려고 하는데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이렇게 왔어요. 아저씨에게 피해 안 가게 잘할 테니까 저희 좀 봐주시면 안될까요?" 아저씨는 우리의 말이 끝나기 전에 대답했다. "아 됐고! 저리 안 가면 너네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좋은  말할 때 저리 가라" 그때 예전에 어떤 사람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하면 안될까요?'가 아닌 '~하게 해주세요.'의 긍정문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저씨에게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아저씨 저희 피해 안 가게 할 자신 있어요. 한 번만 하게 해주세요." 아저씨는 곰곰이 고민하시더니 우리에게 굳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마지막이다. 저리 가라."


그때 저쪽에서 노점상 아주머니께서 아저씨에게 말했다. "저기 그 총각 고생하는 것 같은데 한번 봐줘요." 그리고 옆에 있는 아주머니께서 또 말씀하셨다. "그래요. 서울에서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뭐 크게 방해 안되면 하게 내버려두어요." 아까 친구가 시계를 하나 샀는데 그 시계를 파시던 아주머니였다. 그러자 아저씨의 흥분이 수그러들었다. 그때 우리는 아저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저씨, 저희가 주차요원으로 한 명 드릴 테니까 장사하게 해주세요." 아저씨는 잠깐 머뭇거리시더니 오케이 사인을 하셨고 우리는 장사를 시작했다. 

"폴라로이드 사진 찍어드립니다. 훈련 도중에 핸드폰은 못 봐도, 폴라로이드 사진은 볼 수 있습니다. 폴라로이드 사진 찍고 가세요." 사람들이  한두 사람씩 모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주었다. 입대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양했다. 밝은 사람, 어두운 사람, 차에서 자다가 내려서 잠이 덜 깬 사람, 아직 입대하는 게 실감이 안 나는지 어안이 벙벙한 사람, 슬픈 사람, 어젯밤 친구들과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사람 등 여러 가지의 표정을 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뒤숭숭했다.

<친구와 친구 동생이 밤새 만든 폴라로이드 사진 홍보 패널, 

날씨가 춥지 않으냐며 우리 아들 같다고 말씀하시며 타주신 노점상 아주머니의 커피>


입대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장사도 막바지로 들어섰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장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어머니가 왔다. 아들이 군대를 가는데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아들이 말했다. "이게 내 마지막 사진이네." 어머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울먹이셨다. 옆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사진 찍는다고 웃자고 말씀하시고 그렇게 나는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나는 일부러 사진이 잘못 나온 것 같으니 다시 찍어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몇 장을 더 찍어드렸다. 집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다.


 입대 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102 보충대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짧아서 어색한 빡빡머리를 한 청년들이 보였다. 누군가는 겨우 21개월 하고 돌아올 거면서 왜 그렇게 엄살을 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참으로 그 기분을 설명하기 힘들다. 운동장에 입대를 준비하는 청년들과 그를 둘러쌓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청년들은 아직은 어설프게 오와 열(가로와 세로)를 맞춰서 교관의 인솔에 따라 운동장을 한바퀴 돌았다. 가족들은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곳에 있던 많은 어머니들이 울면서 아들 손을 한번 더 잡아보았고, 아버지는 아프지 말고 잘 다녀오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짠한 마음을 이내 표정에서 감추질 못했다. 그렇게 청년들은 부모님 곁을 떠나 남자가 되는 길을 걸어갔다.

입대하는 장병들이 떠나가고 우리는 부대 안에 있는 P.X를 찾아갔다. 모두가 다른 곳에서 군생활을 했지만 P.X에서 먹는 음식은 비슷했다. 사람들이 이미 다녀가서 인지 매점에는 물품이 얼마 없었다. 우리는 냉동식품 몇 개와 간짬뽕에 스트링치즈를 넣어서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었다. 배부르게 먹고 친구들과 나오면서 기분이 묘했다. 예전에 차례대로 군대를 가면서 헤어진 친구들이었는데 이렇게 같이 와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아무리 먼 이별도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느꼈다.


돌아가는 차편에서 폴라로이드 장사로 번 돈을 계산을 해보니 기름값 + 식비  x3을 하니 그렇게 큰 이익이 나지 않았다. 매주 와서 하기엔 수지가 맞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이제 어딜 가서 장사를 해야 할까.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리고 군대에서 배운 말이 생각났다. 


안되면 될 때까지


장사가 안된다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집에 돌아갔다면 기름값도 식비도 시간도 모두 허탕 친 꼴이 돼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된다고 포기하지 않고 될 때까지 달려드니 어느새 예상치 못한 길이 열렸고, 그 길은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은 보통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일에 있어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일이 매우 힘들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의 많은 것들은 실제로 불가능하지 않다. 아직 폴라로이드 장사의 길은 보이지 않지만 할 수 있다는 걸 믿는다. 돌아가는 차편에서의 마음이 왠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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