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닐 직장이 없다는 것 2

( 자발적 상실 )

by 서장석

첫 번째 비자발적 실직의 경험을 뒤로하고 직장생활이 계속되었다. 욕심을 내려놓고 산다고, 과거의 고통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BURN OUT이 왔다.


오십 후반의 나이에 온 극심한 무기력증은 더 어찌할 수 없는 장애로 다가왔다.

마침 계약 기간도 만료되어 퇴직이 이루어졌다. 노동부에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다시 직장을 구하려는 어떤 노력도 행위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육체와 정신이 철저하게 분리된 이탈의 상태에 접어든 것이었다.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생활이 몇 개월 계속되었다. 아내의 근심 어린 눈과 말하지 않아도 전해져 오는 걱정을 뒤로하고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 도깨비처럼 돌아다니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두세 달 정도 지나고 나서 머리가 수북이 자라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를 깎으려고 이발소에 가서 자리에 앉으니 어떻게 해 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빡빡 밀어주세요❜라고 답하자 주인이 재차 묻는다. 뭐라고요? 난 다시 답해 주었다.

그냥 빡빡 밀어주세요. 시원하게······. 괜찮으시겠어요? 재차 묻는다. 네!

이발하며 잠깐 사이에 깊은 잠이 들었었나 보다. 이발사가 다 끝났다고 깨워 일어났다.

거울을 보니 낯선 남자가 나를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다. 퀭하게 들어간 눈과 마르고 갈라진 입술, 홀쭉하게 들어간 볼살이 영락없는 타인이었다. 게다가 머리마저 빡빡 깎았으니 가사 장삼만 걸치면 승려 행각을 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싶었다.


거울을 보고 나서 정신만이라도 차리고 싶어졌다.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씻어 말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길가에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적혀있는 내용을 일별 하니 ❝2019년 경기도 기술학교 신입생 모집❞이란 글자가 눈에 띈다. 직업 교육을 시켜 준다는 내용이었다. 궁금증이 들어 컴퓨터를 켜고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자세한 사항을 확인하였다. 현재 직업이 없는 사람으로 첨단 기계과, 전기에너지과, 특수용접과, 산업디자인과, 자동차정비과 등에서 1년간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 주고 점심까지 제공해 준단다. 나이가 오십이 넘어도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을 전화로 통화하고 입학원서를 써서 제출하였다. 나는 기계공학 전공이어서 전기에 대한 궁금증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는데 학교에 다닐 수만 있다면 전기에 대한 기초지식을 습득할 수 있으리란 기댈 갖게 하였다.


원서 접수 후 일주일이 지나 서류 합격 통지가 메일로 왔고 면접 일자가 잡혔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하며 뛰었다.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고, 면접장에 가서 담당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지원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역량을 기대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나는 심기일전할 기회가 필요하며 더더군다나 전기를 공부할 수 있다면 감사하겠다고 답하였다. 며칠 후 메일로 합격 통지가 발표되었고 전화로 통화까지 하였다. 가슴이 뛰었다. 세상에 이게 가슴이 뛸 일인가? 새삼 이 나이에 학교에 다닐 수 있다니 작금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무엇엔가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2019년 3월에 입학하여 책상에 앉으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같은 반에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도 눈에 띈다. 서로 수인사하고 일 년간 잘 지내보자고 악수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뒤로 감사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이십 대와 삼십 대 초반의 동급생들과는 처음에 데면데면했는데 차츰 눈에 익어 가면서 허물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다행스러웠던 점은 담당 교수님들이 내 나이대 연배들이었다는 점 일 게다. 교수와 학생으로서 또 비슷한 세월을 살아온 동년배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켜가며 수업하는 재미를 무엇에 견줄 것인가.

학교 수업은 이론수업과 실습으로 나뉘어 있고 재미있던 것은, 매주 수요일 오후 체육 시간이 할애되었다는 것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운동장을 뛰고 젊은 친구들과 축구하며 헛발질과 온갖 허슬 플레이가 난무하는 과정에도 웃음이 운동장 바닥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기능사 자격 취득을 위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기과의 경우 전기기능사와 승강기 기능사를 취득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었다. 수업일수를 충족하면 두 종목의 자격시험 중 한 종목의 이론 시험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기왕 하는 것 두 종목을 다 취득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전기기능사 이론 문제집을 구매하여 공부에 돌입하는 한편, 실기 공부에 심혈을 기울여 참여하였다. 2019년 6월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실시하는 전기기능사 이론 시험을 통과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수원공고에서 실기시험이 실시되었고 온몸에 땀이 범벅된 채로 응시하여 합격하는 소중한 결과물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9월에 실시한 승강기 기능사 시험도 합격하여 기능 계통의 자격증을 획득하는 겹경사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공부하면서 30년 이상 피운 담배마저 끊게 되어 금상첨화였다.


물론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고 생활이 나아지거나 이를 바탕으로 취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엇보다 감사한 점은 공부하는 중에 실업급여를 수령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국민연금을 계속 납부하여야 하는데 실업급여 중 일부를 납부하면 정부가 일정 부분을 부담해 주는 제도가 있어 국민연금 납부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생활 지원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시 생활 전선에 뛰어들 정신적 체력을 비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에 대한 감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동안 식구들에게 가진 미안함은 필설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비축된 체력을 바탕으로 전공 분야 감리 생활을 하려고 준비하였다. 건설 기술인 협회 등록을 마쳤다. 그동안 다녔던 직장이란 곳은 층층시하 윗사람 눈치도 살펴야 하고 아래 부하 직원들 분위기도 감지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감리회사 분위기는 그동안 다녔던 회사와는 사뭇 달랐다. 우선 책임 감리제도를 통하여 자기가 맡은 분야만 책임을 지고 감독하여, 부실 공사를 사전에 막고 안전관리 확인을 다 하면 되는 책임의 소재가 분명한 직군이었다. 대부분의 직장은 공동 책임이란 이슈가 암묵적으로 행하여지는 집단으로서 나만 또는 내가 속한 집단만 잘한다고 해서 책임이, 분위기가 모면되는 조직은 아니었다. 그런데 감리 직군은 자기가 맡은 분야만 철저히 하고 타 직군에 대해서는 맡은 사람이 전문적 기술을 발휘하여 담당 업무를 수행하면 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특이점은 회사에 대한 귀속감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업무 특성을 살펴보니 그럴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간이 존재하는 계약직이고 담당 프로젝트가 끝나면 회사와 담당자 간에 서로 유대를 긴밀히 할 사유가 존재하지 않으며 다음 업무를 회사가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미련 두거나 갖지 않는 구조여서 더욱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감리를 시작할 때 등급이 고급이었다. 초, 중, 고, 특급 4단계로 이루어진 감리 등급 체계에서 어떻게든 등급을 최고 등급으로 올리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특급으로 오르는 방법은 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건축설비기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1년의 준비 기간을 거치면 충분히 도전해 볼 가치가 있어 보였다. 수험서를 사서 1차 준비에 돌입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아침에 본 내용이 오후가 되면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수험생들의 공부 후기를 찾아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고 꾸준한 반복만이 핸디캡을 줄일 수 있다는 요지의 설명. 1차 준비를 6개월 정도 한 후 충북 충주공고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좋은 성적으로 합격. 다시 1.5개월 동안 2차 준비에 매달렸다. 짧은 준비 기간으로 인해 첫 번째 불합격. 다시 2차 준비를 위해 기출문제집을 8회 완독 하였다. 수원에서 치러진 2차 시험은 가까스로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좋은 나이인 삼, 사, 오십 대를 다 보내고 육십이 넘어 늦은 나이에 공부하느라 고생 많았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국가 기술 자격 중에서 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호사를 누리게 될 줄이야.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드디어 건설기술인협회에 자격증을 제출하고 바로 다음 날 등급이 조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특급이다.


2022년에 시작하여 2023년 6월까지 1년 6개월 만에 거둔 결실이었다. 삼 년간 감리 생활을 마치고 자발적 실업 상태를 맞이하고 있다. 2025년은 전국 각지의 건설 공사가 상당수 지연되거나 미루어져 새로운 일자리 갖기가 수월치 않아 보인다. 앞서 한 번의 비자발적 퇴직과 또 한 번의 자발적 퇴직으로 인한 경험이 지금의 경험하고는 근본적 차이를 가져온다. 우선 경제적 의무가 있는 나이 때 맞이하는 직장 상실은 가족 공동체에 심각한 폐해를 가져오며 가정 해체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이것은 상실자 본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1997년 우리는 IMF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이했었다. 그때 수많은 직장인이 자영업자가 중소기업 운영자가 거리로 내몰려 실업 상태가 되며 원하지 않는 가족 분산과 가정 해체라는 비극을 경험했었다. 그때의 극심한 고통과 절망이 우리 사회 곳곳에 많은 변화와 변모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잔재가 지금도 남아 사회 이곳저곳에 합법과 비합법적 규범으로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평생직장의 개념도 거의 사라지고 없다고 생각된다.

여러 가지 사회생활 자체가 달라졌으며 개인의 능력이 생존에 필수적 요소가 되고 있다.


이제 나이 먹은 꼰대지만, 격동의 세월은 산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항상 시의적절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는 식솔들에게 삶의 고통이 전가되지 않도록 세심히 살펴 조심하여야 한다.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거나 비교할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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