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닐 직장이 없다는 것 1

( 비자발적 상실 )

by 서장석

1997년 12월 대한민국에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고 그때 나는 38살 약관의 나이였다.

그때까지 외국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달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모르고 살아왔던 소시민 중의 소시민이었다. 나하고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한밤중 날벼락같은 IMF가 터지면서, 1달러에 2,000원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숫자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온 국민이 나락으로 빠지는 시간을 맞았다. 사람들이 빚 독촉에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중소기업 대표가 투신하며, 거리엔 직장을 잃고 가정이 해체되어 떠도는 노숙자들이 넘쳐나며, 생존을 위한 일차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의 신음과 고통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였다.


나는 직장 한 곳에서 약 30년을 근무하였다. 제대하고 처음으로 경제생활 영역에 편입되어 근무한 곳이었다. 이때는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널리 퍼져있어 그곳에서 모든 것이 영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이었다. 첫 직장에서 순조롭게 적응하지 못하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좌충우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관계에 대한 – 인간관계에 대하여- 적응이 너무 어렵고, 군대에서의 상명하복이, 사회에서 똑 같이 이어지는 현실 부적응이 심한 상태였다. 과연 이 난관을 어찌 헤쳐 가야 되는지 앞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은 것에 후회가 밀려온 순간이기도 했다. 좀 더 열심히 해서 정규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걸 하는 생각을 하였다.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적응이 되기 시작하였고 현 상태에서 좀 더 나은 상태로 JUMP UP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름대로 심각한 검토를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회사는 성장을 위한 여러 가지의 변화가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나 또한 거기에 편승하여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전공 공부와 정규 대학에 대한 열의가 합쳐져 방송대에 진학하여 학위를 취득하였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역할이 증대되었고 만족도 또한 증가되었으며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회사는 한 단계 도약을 위하여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이전을 계획하였다. 나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횔 갖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도 더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일 년 육 개월의 건축 기간과 이전 공사를 마치고 공장이 정상 가동되었다. 공을 인정받아 상장과 부상을 수령하였고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프로젝트가 성공한 후 다른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임원으로 지위 상승과 그에 따른 연봉의 보장 등 마음속에서 그리던 바를 성취하였다는 자기만족으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시간이 찾아왔다. 이직한 지 육 개월 후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급여가 나오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래도 조금만 지나면 정상적으로 돌아오겠지라는 근거 없는 기대와 함께 부질없는 시간만 흘러갔고 이내 확실하게 주저앉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서야 다닐 직장이 없는 직장 상실이라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십 초반에 받은, 원치 않는 성적표를 가지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떤 소리도 하지 않고 출근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급여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날이 지속되자 가장으로서 자기 비하와 아빠로서 기본적 역할의 결여가 주는 상실감이 극에 달했다. 하루는 출근하는 길에 갈 곳 없어 강원도 영월로 차를 돌려 동강 둑에 주차하고 마트에서 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하릴없이 흘러가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자발적 직장 상실자로의 첫 경험 시작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흐르는 강물과 함께 일어나고 스러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은 무엇인지 몇 번을 되묻고 되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돈이 없어 여관이나 민박을 잡아 편안한 잠자리를 갖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소주 한 병을 사서 입에 털어 넣었다.

왜 잘못한 게 없는데 이 고통을 받아야 하고 가족에게 까지 같은 고통을 감내하도록 해야 하는지에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극단적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만 이틀이 지나고 정신을 수습하여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다리 앞 검문소에서 정차 신호를 보낸다. 경찰이 다가와 주민등록증을 요구한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왜 그러느냐고 질문하자 가출 신고가 접수되었다고 알려준다. 요즈음 다들 힘들어한다고 경찰이 한마디 한다.


귓등으로 흘렸다.

정말 힘들 때는 직접적 위로가 부담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차라리 그냥 지켜봐 주는 것이 제힘으로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따듯한 눈길로 지켜봐 주는 게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극심한 정신적 공황 상태가 지속되었고 신체적 무능력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참으로 좋은 것은 세월이고 시간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밥 먹는 식당 한구석에 붙어있던 글귀가 눈에

들어오고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아니하였다. 맞다. 죽을 것 같던 고통과 원망도 시간이 가며 옅어졌고 다행히 밀린 급여와 퇴직금으로 부족하였던 생활을 회복할 수 있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이 있다. 맞는 말이지만 실질적으로 급하면 뛰어가거나 지름길을 찾게 된다. 누구나 그렇다.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눈에 와닿지도 아니하였다. 지나고 보니 언행일치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생활에서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부단히 심신을 단련하는 공부가 필요한가 보다.


아픔을 자주 겪는다고 해서 아픔이 희석되지는 않는다. 아픔은 매번 새로운 아픔이고 통증으로 다가온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인생의 굴곡은 다가오고 물러간다. 다가왔을 때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떠나보낼 때 다시 오지 않도록 대처를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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