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paris_감명폭발 인상파 여유폭발 튈르리

by sseozi

드디어 5층에 입성했다. 미술에 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게 된다는 인상파지만, 사실 나는 인상파에 크게 흥미가 없었던데다 오랜 시간 루브르박물관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 오르세미술관이 조금 덜 특별했었다. 오르세미술관의 명성이 워낙 높으니 ‘도장 찍고 온다.’ 이 정도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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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날부로 나의 인생 미술관이 바뀌게 되었다. 0층을 보고 왔기 때문에 후기 인상파 작품이 가진 힘이 더 잘 느껴졌다. 거침없고 확신에 찬 소재 선정, 구도, 색감, 붓터치. ‘남이 뭐라 하든 기어코 나는 이것을 이렇게 그려야겠는데 어쩔 거냐?’ 하는 뚝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20240604_154538.jpg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에서 만났던 르누아르의 작품들. 본고장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반가워라. 위 작품은 각각 도시의 커플과 시골의 커플을 대조적으로 그려낸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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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4_160406.jpg 클로드 모네, 임종을 맞은 카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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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를 그렸던 마네의 또 다른 문제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만났다. 뚝심 그 자체다. 당시 주제, 구도, 색감 등 전체적으로 엄청난 혹평과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도발적인 예술가의 등장이 후기 인상파 등장의 씨앗이 되는 것이 놀랍다. 근대의 미술계는 그저 꽃피운 것이 아니라 폭죽이 터지듯 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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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카유보트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처음 보는 그림인데, 침착한 역동성과 힘이 느껴지는 남성적인 분위기가 인상 깊어 멈추고 살펴보면, 모두 카유보트의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가 많이 등장한다. 남자 노동자들이 웃통 벗고 마루를 대패질하는 작품과 비 오는 파리 거리를 그린 그림이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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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 그림으로 유명한 에드가 드가의 작품들. 후원자의 시선에서 어린 발레리나들을 바라보는 구도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예쁜 소녀들이 나오는 그림과는 다르게, 예술가들의 파리 책 속의 드가가 생각보다 까다롭고 괴팍한 고집쟁이였어서 처음엔 좀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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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고보니 발레리나 외에도 도시의 다소 우중충한 이면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작품들이 많았다. 어느 그림이든 내가 선 그 자리에서 그림 속 대상을 훔쳐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 또한 드가의 성격이 드러난 점일까. 미술 작품을 접할 땐 언제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걸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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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도 재발견했다. 익히 명성을 들어오고 그림도 접해왔으나, 실제로 본 그의 작품은 모니터나 책에서 접했던 것과는 아예 달랐다. 폴 세잔의 그림이 가진 힘이 사진에는 하나도 안 담긴 것이었다. 질감이 느껴지는 얼룩덜룩한 색의 향연과 선이 굵은 그림의 강한 인상은, 다른 그림들이 밋밋하게 느껴지게 할 정도였다. 그 감명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한국에 돌아와 그림들을 찾아보았지만, 실물의 느낌을 잘 살린 것을 여전히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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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역시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저냥 했었는데, 실물로 본 순간, 지난날들을 후회했다. 진짜 미쳤다. 그냥 미쳤다. 지금까지 보아온 그림들과 전혀 다른 세상의 그림이다. ‘별이 빛나는 밤’은 없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충격받고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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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세계에선 색이 다르게 작동하는가보다. 형광등을 켠 것처럼 자체 발광하는 색깔들이 막 액자를 뚫고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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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가 고흐의 그림은 꼭 확대해서 동영상으로 찍어야 그 느낌을 잘 남길 수 있다고 알려줬다. 영상으로 찍으니, 붓질로 울퉁불퉁한 부분마다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며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혹평할 수가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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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쇠라의 점묘화도 재발견했다. 점묘화는 흐릿해 보이는데다 어린이 그림 같아서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실물이 엄청났다. 실제와 다른 색의 점을 섞어서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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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동안 다양한 시대의 숱한 미술 작품들을 보아오면서, 비슷한 작품들은 어느 정도 머릿속에서 인상이 뭉개지고 뒤섞여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쇠라처럼 독창적인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낸 화가들은 모두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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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그림도 장난 아니다. 이 시절 사람들이 색을 쓰는 방식과 고유한 화풍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이 특별하다. 후기 인상파와 활약하던 19세기 후반을 거치며 얼마나 예술적 표현이 풍부해졌는지 알 것만 같다. 인상파가 사랑받는 이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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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음마다 감명에 감명을 더하며 온몸이 감명에 절여지다시피 했던 5층 관람을 마치고 투어가 끝났다. 인상들을 곱씹으며 중간층의 조각들을 관람하러 갔다.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로댕의 ‘지옥의 문’을 다시 만났다. 이번엔 하얀 대리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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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시 만날 줄 몰랐는데, 온통 하얀색인 지옥의 문은 로댕미술관에서 본 것과 아주 다른 느낌이다. 검은 지옥의 문이 정말 지하 세계의 입구 같았다면, 하얀 지옥의 문은 천상계로 향하는 입구 같았다. 이 앞에서 오래오래 머무르며 오르세 미술관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하얗게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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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원 없이 서너 시간의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튈르리 공원으로 향했다. 어제는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바삐 걸어가느라 공원에서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했는데, 오늘은 꼭 여기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만끽하리라. 늦은 오후의 공원은 아침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지만, 아침보다 빛이 살짝 사그라들어 눈이 훨씬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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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늘이 짙게 늘어선 곳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기분 좋은 차가움이 몸을 타고 느껴졌다. 바람에 나뭇잎들이 쉴 새 없이 사각거렸다. 완벽한 순간에 더욱 완벽을 더하는 이 나뭇잎 소리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리다. 벤치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독서 모임에서 한창 읽고 있는 책 「닥터 지바고」를 꺼냈다. 프랑스에 여행 와서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시간을 소요하는 사치라니. 이보다 행복할 수가 있을까. 책도 잘 읽히고 눈도 즐겁고 귀도 즐겁고 마음은 편안한 시간. 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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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행은 완전히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어쩌지. 난 이제 이곳이 나의 현실 같은데. 8시간의 시차로 다른 시간 속에 바삐 지내고 있을 아들과 남편, 직장 동료들이 말 그대로 지구 반대편의 일처럼 느껴졌다. 바깥에 나와 있기 딱 좋은 선선한 온도에, 기분 좋은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 들고, 새 소리와 사람들의 산뜻한 대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 지금 여기의 감각만이 실제인 것 같은데, 어쩌나. 이 행복에 풍덩 뛰어들어 온몸으로 누릴 수밖에.


살짝 무료함이 느껴질 즈음까지 시계를 확인하지 않는 사치를 부렸다. 실컷 공원의 여유를 누리고 나니 해가 뉘엿해지고 있었다. 아직 6시쯤이라 많은 식당이 브레이크 타임일 테고, 패스트푸드는 먹고 싶지 않았다. 구글 지도로 근처 맛집을 찾아보니 굴리(guli)라는 이름의 탄탄면 집이 나왔다. 탄탄면이라니 너무 좋다. 쇼핑과 맛집에 초점을 두지 않은 여행인 게 상당히 티 나는 안일한 선택이다. 그래도 이 한 몸 편한 게 중요한 저질 체력이라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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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면과 만두 세트에 칭따오 맥주를 함께 시켜 먹었는데, 진짜 너무 맛있었다. 두 번 오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오늘, 정말,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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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포만감과 이불이 반가운 노곤함을 함께 안고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간식거리도 잔뜩 사가지고 와서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는 만찬을 즐겼다. 내일은 희원이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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