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 paris_리슐리외 도서관과 퐁피두 센터

by sseozi

호텔 오페라 맹트농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카운터에 캐리어를 맡기고 어제와 같이 온더밥으로 향했다. 비빔밥에 해초무침을 주문해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미리 챙겨온 음료수를 사장님께 건네며 작은 마음을 전했다. “여기에 있어 주셔서 감사해요. 여행하면서 너무 맛있게 잘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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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리슐리외 도서관을 들렀다가, 퐁피두 센터 미술관 투어에 참여한다. 관람이 끝나면 미식 투어 때 먹었던 맛난 마카롱과 샤베트를 사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 뒤 희원이네 집으로 돌아간다. 알찬 일정이다. 날이 다시 꾸물꾸물해지기 시작했지만, 지난 이틀 동안 환상적인 날씨를 만끽했으니 괜찮다. 가자, 도서관으로!


파리에는 리슐리외 도서관, 미테랑 도서관, 마자랭 도서관, 퐁피두 도서관,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 등 멋진 도서관이 여럿 있다. 안 그래도 고풍스러운 도서관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여행을 준비하며 마주친 도서관 사진마다 꿈에 그리던 풍경이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클래식한 도서관 속에 녹아 들어서 책을 읽어야지. 풍경의 일부분이 되어야지. 이번 여행에서 도서관을 한곳이라도 꼭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꿈에 그리던 파리의 도서관으로 떠날 시간이 왔다. 호텔에서 5분 거리에 프랑스 국립 도서관인 리슐리외 도서관이 있다. 여행 중에 언제든 틈내어 다녀올 수 있도록, 애초에 도서관과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20240605_134217.jpg 리슐리외 도서관(BnF)


리슐리외 도서관은 17세기에 지어졌고, 무려 태양왕 루이 14세의 도서관으로 쓰였던 곳이라 한다. 오래된 건물을 계속 쓰는 일은 여러모로 불편할 텐데,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고 역사 깊은 건물을 본래 모습대로 활용하는 게 대단하다.


그나저나 도서관을 한곳만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셰익스피어앤컴퍼니 서점 근처의 마자랭 도서관도 점찍어 놨었는데, 그날 일정이 빡빡해서 도저히 갈 틈을 못 냈다. 맞다, 그날 근처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에도 가보려 했는데, 못 갔네. 여행이 끝을 향해 가는데, 못 간 곳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몽마르뜨 언덕, 샤크레 쾨르 성당, 피카소 미술관,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퐁뇌프 다리 등등. 이제는 정말 여행의 매 순간이 아쉬워지기 시작한다.


20240605_123628.jpg 리슐리외 도서관(BnF)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금세 도서관에 도착했다. 등록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열람실과 관광객 포함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열람실이 나뉘어 있다. 오래 머무를 것은 아니니 등록하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는 열람실로 향했다. 모두에게 개방된 곳이니 조금 덜 신경 써서 운영되고 있으려나, 하며 들어갔는데, 와, 입이 딱 벌어졌다.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도서관 저리 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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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롯데월드가 생각나는 커다란 유리천장과 거대한 타원형 열람실의 온 벽을 가득 채운 책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들은 4개 층에 걸쳐 벽을 따라 길게 둘러서 있었다. 유리천장을 통해 햇볕이 화사하게 온 공간을 비추고 있었고, 열람실 가운데엔 자리마다 예쁜 램프가 놓인 고풍스러운 목제 책상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좌석마다 사람들이 빈틈없이 앉아서 공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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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야 하나 잠시 벙찐 사이, 마침 1인용 소파에 자리가 하나 났다. 얼른 소파에 앉아 전 사람의 체온을 느끼며 책을 펼쳐 들었다. 시선이 자꾸 책 너머 열람실 전경을 향했다. 꺅, 이 공간에, 이 시간에, 이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이번 여행 통틀어 최고의 순간이다. 도서관 풍경을 찍어 독서 모임 단톡방에 올리자, 멤버들의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그래요, 이 마음 그대들이 가장 잘 알지요. 책을 읽다 도서관 풍경을 바라보다 다시 책 읽기를 반복하며 오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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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투어가 예정된 퐁피두 센터로 향했다. 퐁피두 센터에는 초현실주의 등 20세기 이후 현대 미술 작품들이 모여 있다. 구불구불한 애벌레 모양의 에스컬레이터가 드러난 외관이 유명하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 메탈 소재의 파이프들이 노출된 외관에서 더욱 쇠 맛이 나는 듯했다.


20240605_135843.jpg 조르주 퐁피두 센터


안으로 들어가니 외부와 마찬가지로 각종 배관이 드러나 있었는데, 빨강, 노랑, 초록, 파랑 원색을 거침없이 사용한 데에서 젊음과 활기가 마구 느껴졌다. 확실히 지금까지 보아온 미술관들과 다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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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은 완전히 문외한인지라 대단한 작품을 만나더라도 이게 무슨 작품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 못 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미리 투어를 신청했다. 난해한 만큼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 해서였을까. 초반엔 인원이 충분히 모이지 않아 투어가 취소될 뻔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히 인원이 적당히 잘 차서 무사히 투어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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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투어의 가이드는 프랑스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한 분이었는데, 정말 이분 아니었으면 퐁피두 센터는 그저 스치듯 후루룩 보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해설을 들으면서도 이게 왜 대단한 작품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으니까. 가이드는 우리에게 거듭 이야기했다. 현대미술은 난해한 면도 있지만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그중에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되는 거라고. 취향으로 접근하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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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현대미술은 쉽지 않았다. 작품마다 설명을 들었지만, 지나고 나니 흐름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대신에 작품마다 강하고 선명한 인상이 남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상상하지 못했던 기법의 그림이 거대한 캔버스로 나타났을 때, 그 강한 인상들이 고스란히 가슴 어딘가에 선연하게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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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피카소, 샤갈,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시작된 관람은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 칸딘스키, 몬드리안의 작품을 거쳐 작가가 누군지 알아볼 엄두도 나지 않는 파격적인 설치미술 관람으로 이어졌다. 내가 과연 피카소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피카소의 작품은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편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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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색채와 야성적인 드로잉의 마티스, 정갈하게 그려진 기묘한 풍경 속에 메시지를 담은 르네 마그리트, 선명한 색채의 몽환적인 그림을 그린 샤갈 등 이름을 들어본 사람의 작품이라면 그나마 무엇을 표현하려 한 건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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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 선, 면으로 단순하게 거대한 캔버스를 채운 작품을 앞에 두고선 여기에서 무얼 느껴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반대로 그저 색일 뿐인데, 왜 이리 처절한 감정이 느껴지는 건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방을 하나 건너갈 때마다 기발한 발상의 설치미술이 영감을 깨우는 기분이 들어 흥미롭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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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에서의 시간은 여러 질문으로도 남아있다. 아름답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 애초에 아름다워야만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인지, 겉보기엔 너무 쉽고 단조로워 성의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작품이 어떻게 대작인지. 명확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모든 질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하며 마음이 저절로 답했다. 이곳에서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그럴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퐁피두 센터는 그렇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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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를 나오니 바로 앞에 한국 음식점이 보였다. 파리의 명소 앞에 한식당이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출출하기도 해서 요기를 할 겸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대학가 펍 같은 분위기였는데, 오타 섞인 한글 네온사인으로 내부를 장식한 것이 나름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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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개, 떡볶이, 치킨, 닭갈비, 김치전 등 메뉴가 다양했는데, ‘김치볶음밥 밥 kimchi bomb’라고 쓰여있는 정체불명의 메뉴에 구미가 당겼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일종의 김치볶음밥 주먹밥이라는 것 같았다. 옆 테이블을 보니 탁구공만 한 주먹밥 같은 것을 먹고 있길래, 저걸론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아 ‘김치 봄브’를 3알 주문했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또 매우 당황하게 된다. 직원이 거의 제수용 사과 크기만 한 주먹밥을 세 그릇 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이놈의 파리는 음식 주문에 관해서 정말 내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내 동공이 격한 지진을 일으키자, 직원이 사태를 파악하고 안쓰러워하며 응원을 보냈다. 김치 봄브는 프랑스 여행 6일 차에 먹기 딱 알맞게 익숙하고 그리운 맛이었지만, 아무리 애써도 1.5알 이상은 무리였다. 직원은 남은 주먹밥을 바리바리 싸주었고, 결국 그 녀석은 숙소에서 야식으로 해치워야 했다. 이번 여행 시행착오가 끝이 없구나, 에헤라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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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원이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이들에게 선물할 마카롱을 사러 마레 지구에 들렀다. 마레 지구는 예술, 패션, 음식 등 파리 문화의 중심지로, 다양한 편집숍과 플래그십 스토어, 맛집, 디저트숍이 몰려있는 핫한 쇼핑거리다. 젊은 감성의 독특한 분위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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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정보를 검색할 때마다 마레 지구가 빠지지 않고 나왔다. 쇼핑에 관심이 없어 일정에 넣지 않았었는데, 퐁피두에서 가장 가까운 피에르 에르메가 마레 지구에 있어 짧게나마 들르게 되었다. 시간이 부족해 상점들을 방문하진 못했지만, 프랑스의 가게들은 외관만 보아도 충분히 멋스러웠다. 스타일 좋은 사람들 속에 섞여, 마레 지구를 상징하는 무지개가 곳곳에 그려진 경쾌한 거리를 거니는 느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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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에 파리시청도 지나갔다. 시청이라 하기엔 너무나 너무나 예뻤다. 건물 전면에 조각조각 설치된 올림픽 개최 기념 현수막도 어찌나 감각적인지, 한국의 오래 묵은 공공기관 건물, 조잡하고 현수막들과 비교됐다. 시청이 이렇게 예쁠 수 있다니, 아름다운 건물을 눈앞에 두고도 믿기지 않아 머릿속이 삐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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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청 주변엔 게슴츠레한 눈으로 행인들을 쳐다보는 노숙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눈빛이 무서워서 더 구경하지 못하고 빠르게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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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에서 낭만적인 환상과 함께 그저 그런 삶들 또한 보고 온 것 같다. 좀만 더 어렸거나 누군가 함께 왔다면 상점가 풍경에 그저 설렜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침잠하는 혼자의 눈으로는 예쁨 이면에 숨겨진 관광지의 거품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여느 여행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감정이다.


이제 정말 파리에서의 2박 3일을 마무리하고 좡빌르뽕으로 돌아간다. 왜 울 것 같을까. 왜 울고 싶을까. 끝나가는 여행이 아쉬워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서? 여행의 순간순간도 실제고, 일상의 현실도 실제다. 한바탕 꿈과 같았던 파리에서의 나날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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