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paris_오늘 하루는 오르세미술관, 너다

by sseozi

나의 여행은 초급 중의 초급이다. 지인의 집에서 안전하게 묵었지, 매사 챙겨주는 친구가 있지, 일정도 널널하지, 구석구석 맛집을 찾아다니지도 않지, 동선도 다른 관광객에 비하면 단순하고 짧다. 게으른 성정 때문인지 몸과 정신이 피곤해지는 게 가장 불편했다.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나면, 꼭 이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말이 길었다. 늦잠 잤다는 이야기다. 전날 오래 걸은 탓에 피곤에 찌든데다, 밤에는 4시간이나 넷플릭스 시청에 열중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파리 여행하는 사람답지 않게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하지만 조급하지 않았다. 오늘의 일정은 단 하나, 오르세 미술관 뿐이기 때문이다!


20240604_134324.jpg 거리에서 마주친 파리 골댕이


우선 느긋하게 아점을 먹으러 호텔 근처에 한식당으로 갔다. 이름하여 ‘온더밥(on the bob)’. 카운터에 한국인 여사장님이 있었고, 낯선 K-pop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식당 안은 거의 만석이었는데 대부분 주변 직장인 같았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한식이 이렇게나 인기 있다니 신기하고 뿌듯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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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비빔밥을 먹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숟가락으로 떠먹는 게 아니라 젓가락으로 집어 먹고 있었다. 비빔밥을 젓가락으로 먹기 쉽지 않을 텐데, 샐러드처럼 야채가 풍성한 건강식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난 순두부찌개, 잡채, 오이소박이를 시켰다. 이 메뉴가 뭔지 몰라서 주문하지 못한 게 분명한 사람들 속에서 찐 한국인 포스를 풍기며 와구와구 먹었다. 익숙한 초록얼룩 분식집 그릇과 노란 냄비에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감동이 몰려왔다. 솔직히 좀 울컥했다.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고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했다. 20분 정도 걸어가는 동안, 화창한 날씨에 한층 더 행복했다. 날이 너무 맑아서 황홀할 지경이었다. 높은 건물 없이 사방으로 탁 트인 하늘이 고스란히 다 보였다. 말도 안 되게 아름답고 광활한 하늘이었다. 유럽의 대기는 뭔가 남다른 건지 뭉게구름 모양마저도 특별해 보였다. 이런 멋진 하늘 아래에서 그저 감탄만으로 그칠 수 없었기에 그 수많은 예술가가 프랑스의 하늘을 그렸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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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드디어 센강을 직접 걸어서 건너는 날이 왔다. 강 건너편에 오르세미술관이 보였다. 센강이 생각보다 누런 녹색이어서 놀랐다. 오르세미술관은 예쁘고 멋지고 혼자 다 했다. 하늘이 너무 예뻐서 어떻게 찍어도 모든 사진이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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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박물관 투어를 진행했던 가이드가 오르세미술관 투어에 또 배정되었다. 가이드는 오르세에도 발바닥에 땀 나도록 거침없고 빡센 투어를 이끌어 주었다. 얼기설기 알고 있던 내용에 가이드의 알찬 설명이 견실하게 더해져 내 안에 오르세 미술관의 윤곽을 뚜렷하게 세울 수 있었다.


20240604_135123.jpg 오르세미술관 투어 집합 장소였던 말 동상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기차역이었다. 1900년에 지어져 1970년대까지 기차역으로 쓰였다. 이후 지하로 역을 옮기며 1986년에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기차역 시절의 거대한 황금 시계가 여전히 남아서 오르세의 상징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인상파를 비롯한, 19세기 이후 근대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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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은 작품의 배치부터 흥미롭다. 기존에 기차 승강장이었을 0층에는 인상파 이전의 사조인 사실주의, 낭만주의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중간층엔 조각들이, 5층엔 모네, 르누아르, 고흐, 고갱 등 유명한 후기 인상파 작품이 대거 전시되어 있다.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애초에 5층만을 집중 공략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있지, 후후.


20240604_141015.jpg 치얼쓰


우리의 투어는 0층에서 시작되었다. 인상파 등장 직전에, 또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들이 있었다. 여행 전 ‘예술가들의 파리’ 시리즈를 읽으며 흥미로웠던 부분이, 살롱전에 계속 도전하는 인상파와 썩 좋지 않은 평단의 반응, 그리고 인상파 대신 크게 인정받으며 살롱전에서 입상한 작품들의 대비였다. 0층에선 바로 그 살롱전에서 수상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인상파와 대비되는 구도로 이름난,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그런데 이 작품 자체로도 충분히, 아니, 엄청 아름다웠다. 가이드는, 이런 작품은 당대 신사들이 그림의 요소요소를 보며 그리스 로마 신화에 얽힌 지식을 뽐내면서, 한편으로는 여성의 아름다운 나체를 은근히 관람하기 위한 대상으로 기능하기도 했었다며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그 또한 흥미로웠으나 내 눈엔 그저 예쁘고 황홀했던 그림이다.


20240604_143158.jpg 비너스의 탄생,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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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4_142330.jpg 인상파 이전 사조의 작품들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로 유명한 밀레의 작품들도 보았다. 생각보다 작았다. 놀랍게도 밀레의 그림들은 대부분 상상화라고 한다. 야외에서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려낸 그림이 아니라, 있을 법한 모습을 상상하며 그려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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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쿠르베의 ‘샘’. 나체인 여자가 등지고 앉아 있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구도 때문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샘’에 대한 기존의 모범적인 구도의 작품은 도미니크 앵그르의 ‘샘’이다. 둘을 비교하니 쿠르베의 작품이 얼마나 당돌한 변주인지 뚜렷이 느껴졌다.


20240604_145422.jpg 샘, 구스타브 쿠르베
도미니크 앵그르의 샘.png 샘, 도미니크 앵그르


드디어 만났다. 마네의 올랭피아!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발표 당시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올랭피아. 대담하게 관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림이라니, 여신이나 님프가 아닌 당시 관람객들이 너도나도 알고 있던 고급 창녀의 얼굴로, 심지어 나체로. 웃음기 없는 건조한 얼굴로 또렷이 던지는 눈길 때문인 걸까. 단순한 구도인데도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20240604_150129.jpg 올랭피아, 에두아르 마
20240604_150603.jpg 올랭피아를 바라보는 두 외쿡 아저씨
20240604_151426.jpg 오페라 가르니에 내부 그림
20240604_151452.jpg 오페라 가르니에 모형
20240604_151506.jpg 오페라 가르니에 모형, 위 그림 속 공간이 보인다
20240604_151850.jpg 아름다운 건물과 도시는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지
20240604_152051.jpg 거대한 파리 항공뷰 그림. 열기구를 타며 그렸다나. 화가의 용감무쌍한 열정 덕분에 100여 년 전 파리가 한창 재개발되던 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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