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호 할머님이 남기신 말씀이 신경에 거슬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상구 씨 어디 안 좋아? 영 힘을 못쓰네"
"아! 아닙니다. 생각이 복잡해서 그래요!"
"뭐! 생각! 이 친구 큰일낼 친구네... 막노동 판에선 자기 안전 말고 다른 생각이란 걸 하면 안 돼!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 무조건 안전이야! 정신 차려 그러다 다치는 거야!"
여간해선 큰소리치지 않던 십장이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위쪽에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악! 팅! 텅! 텅!" 내가 두 번째 소리를 인식했을 때 이미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벽돌을 보았다.
내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 바닥에 떨어진 벽돌이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처음부터 갈라진 것이 떨어진 것인지 떨어지면서 갈라진 것인지 그도 아니면 바닥에 떨어지면서 깨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저 봐라!" 십장이 놀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십장에게 훈계를 당하는 동안 웅성거리는 인부들의 소리에 둘은 밖으로 나와 그들의 시선과 합류하였다.
머문 시선엔 이 씨 아저씨가 안전그물에 매달려 있었지만 왼쪽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 씨 괜찮아?" 십장이 소리쳤지만 누가 봐도 괜찮을 리 없는 이 씨 아저씨는 고통스러운 신음만 토해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안전요원과 구급차가 도착을 했고 구급대원의 들것에 실려가는 이 씨 아저씨는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송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이 씨 아저씨의 안전모가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처음 안전모를 벗은 이 씨 아저씨를 보았다.
"민머리시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지만 곁에 있던 장목수 아저씨가 '민머리가 왜?' 하시며 성을 내셨다.
"아뇨 그렇다고요. 늘 모자를 쓰고 계셔서 민머린지 몰랐어요. 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저러나 아저씨 괜찮으셔야 할 텐데..."
걱정을 했지만 변명이 되어버린 듯한 상황에 장목수 아저씨가 눈을 흘기며 꾸짖고선 곁을 지나치셨다.
"다친 사람 보면서 민머리네 아니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동료한테, 자네 실망이야"
"죄송합니다. 정말 별 뜻 없이 한 소리예요"
연신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과했지만 장목수 아저씨는 '알았어!'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현장으로 사라지셨다.
그날 나의 언행은 하루종일 가십거리가 되어 퇴근 무렵까지 나를 힘들게 하였다.
퇴근 후 편의점을 들러 집으로 향할 때 도깨비시장이 파장하는 모습을 보았다.
텐트를 접는 사람들 틈에 고물 파는 아저씨를 찾아보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때 잠시 잊고 있던 칼이 문득 생각났다.
경비실을 지나는데 903호 할머니가 또 경비실 아저씨에게 혼쭐이 나고 있었지만 난 애써 모른 척하고 그곳을 빠르게 지나쳤다.
만신 할머님이 그런 나를 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날 새벽 또다시 '드르륵'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일어난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위층으로 올라가 벨을 눌러 할머님을 결국 깨웠지만 할머님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의연하게 날 맞이 하셨다.
"생각보다 늦었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침에 바로 올 줄 알았는데.... 자네 생각보다 무딘가 보네 허긴 그러니 여태 연애도 한번 못해보고 그 나이에 궁상이지.... 쯧쯧쯧!"
할머니의 악담에 화가 난 내가 참았던 소리를 버럭 질러봤지만 할머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뭐요! 이 할버니가 어디서 악담이야! 내가 새벽에는 짐 옮기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웃끼리 지킬 건 좀 지켜주셔야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오히려 나를 노려보며 훈계하듯 말씀하셨다.
"네 아들놈이 그런 거라고 썩을 놈아!"
"뭐요! 장가도 안 간 총각에게 아들이라니요 이 할머니가 미쳤나!"
그러자 할머니가 박장대소하시며 말씀하셨다.
"장롱에 숨겨둔 아들에게 가서 물어봐라"
할머니의 말씀에 머릿털이 쭈뼛 거리며 온몸의 털이 쏟아 올랐다.
물론 그간의 꿈 때문에 장롱 속 칼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는 의심은 했지만, 막상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과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할머니는 그 말씀만 남기고 다시 댁으로 들어가셨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장롱에 숨겨둔 아들이라면 분명 얼마 전 구입했던 칼을 말씀하실 테지만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온갖 상상을 하며 지금까지의 꿈들이 무관하지 않음을 직시하였다.
하지만 선 듯 받아들이기엔 허무맹랑한 말 같았고 과연 2024년에 일어날법한 일인가에 대해선 납득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우주를 여행하는 세상에 이 무슨 회개한 생각이란 말인가 라며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하자
기어이 903호 할머니를 노망 난 사람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노망 난 할머니의 망언쯤으로 몰아가는 것이 현실을 부정하기엔 가장 완벽한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는 것 말고는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수운건 노망 난 할머니라 치부하고 확신을 했지만 칼이 들어있는 드레스룸을 지날 때면 불안하고 무섭고 신경이 쓰여 이전의 편안함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다시 돌아와 몸을 뉘었지만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아 한동안 뒤적이다 막 잠에 들었는데 또다시 '드드득'소리가 허공을 맴돌다 귓속을 파고들었다.
"에이 할머니 신경 쓰이게.... 내가 확인한다 확인해! 아니기만 해 봐라!"
나는 드레스룸의 문을 열어보기 위해 한걸음에 그곳으로 갔지만 막상 문을 열려니 불안하고 찜찜한 생각이 팔목을 잡았다.
그때 또다시 '드드득'거리며 옷장문이 움찔거렸다.
"아악!" 나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치다 열려있던 문에 뒷 머리를 찍혔지만 느끼지 못했다.
순간 소름이 온몸을 감 싸돌았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한기마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