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빌런

자전거 끄는 여자(#2)

by 서기선

직장 상사들과의 술자리가 즐거울 리 없던 나는 회식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처럼 다 내려놓고 맘 편히 마실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식의 대부분은 2차까지 이어졌는데 1차던 2차던 장소만 바뀌었을 뿐 내겐 특별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를 때면 꽁무니를 빼는 여직원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면 과장님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쩍 빼돌려 집으로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빼돌린다는 표현이 조금은 진부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김 과장이 "야! 서대리 오늘도 미스강 빼돌렸냐?" 했던 것이 빼돌렸다는 표현의 시작이었다.

"예... 뭐~ 하하! 죄송합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선 솔직해야 한다.

어쭙잖은 핑계를 대다간 오히려 욕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 범위 내에서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그동안 쌓아온 나만의 처세술 같은 것이었다.

멋쩍은 웃음으로 적당히 바보같이 웃어 보이며, 죄송하다고 말하고 아직 남아있는 소주병을 들고 과장님에게 한잔 따르는 것으로 이번에도 잘 넘어갔다.

노래방을 나오면 김 과장을 재일먼저 보내야 한다. 그래야 더는 팀원들이 피해? 보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피해뒤에 물음표를 붙인 건 이대리는 김 과장이 가고 난 뒤에야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와~ 꼰대! 미치는 줄 알았네... 야! 서대리! 기분 좋게 한잔만 더 하고 가자!" 김 과장을 태운 택시가 출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대리가 말했다.

"다음에 하자 오늘은 진짜 피곤해서 그래"

"내가 너 그런 말 할 줄 알았다.! 너 인마 그러는 거 아니다. 너 솔직히 나 무시하지?"

이대리가 공연히 트집을 잡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아침이면 잊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굳이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얼근 들어가"

비틀거리는 이대리를 뒤로하고 서둘러 걸었다.

이대리도 나도 회사 근처에 집이 있기 때문에 굳이 택시를 타지 않아도 된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이대리는 아무도 없어야 집에 들어가는 버릇이 있다.

다음날 출근하지 않을 각오가 서지 않으면 대꾸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진정한 빌런은 이대리일지 모른다.

나는 녀석을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빈 택시가 있었지만 타지 않고 걸었던 건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살짝 스치는 기분이 나쁘지 않기 때문이었다.

상봉 사거리에서 교문리 방향으로 꺾어 10분 정도 걸으면 집이 나온다.

내가 막 교문리 방향으로 꺾어 걸어 올라갈 때 자전거를 끌며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라! 그 여자네!" 우연이겠지만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반가워 혼잣말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굳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걸 걱정하는 건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나왔다.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가 내쪽을 보며 조금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여자는 술 마시면 안 돼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그녀가 뒤 돌아 내게 소리칠 때 동그란 안경 너머로 흐르는 눈물이 서러워 보였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여인이 나의 사과를 받아들인 건지 무시하는 건지 아무런 말도 없이 뒤돌아 자전거를 끌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왜 자꾸만 따라와요! 내가 불쌍해 보여요? 그것도 아니면 아저씨 치안이에요?"

자신의 뒤를 따라온다고 생각한 그녀가 다시 한번 뒤돌아 소리쳤다.

"저... 우리 집도 이 방향인데요 저기 리치빌라에 살아요"

오른손을 들어 빌라를 가리키던 손이 부끄러워 서둘러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고 더 이상의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이번엔 내가 먼저 걸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다 빌라 입구에 도착해서야 잠시 뒤돌아 봤다.

힘겹게 자전거를 끌며 올라오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내쪽을 쳐다보자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집으로 들어왔다.

"뭐야! 저 여자, 사과도 안 하고!, 별 희한한 사람 다 보겠네."

집안공기가 따뜻해서일까 어쩔 수 없이 받아먹은 술 때문일까? 현관에서부터 다리에 힘이 빠져 신발을 체 벗지도 못하고 입구에 널브러져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 힘겹게 일어서 욕실로 향한 나는 또 한 번 칫솔을 입에 문체 꾸벅거렸다.

"아~ 안 되겠다 빨리 씻고 자야지!" 양 뺨을 서너 차례 토닥이고 서둘러 양치를 마친 나는 세수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침실에 널브러졌다.

요란한 휴대전화의 알람이 울자 몸에 밴 습관이 침대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혔다.

부스스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버릇처럼 밖으로 걸어 나오다 현관에 걸려있던 전신 거울에 출근복장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봤다.

"아 맞다! 어제 회식했지! 이러고 잔 거야!"

서둘러 환복하고 밖으로 나온 나는 평소처럼 망우리를 지나 교문 사거리 쪽으로 뛰었다.

9월 말이지만 아침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그러나 나는 뺨을 스치는 바람이 좋아 쌀쌀하기보다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헉헉거리며 뛰어다니면 몸에서 열이 올라와 이 정도의 바람으론 몸의 열기를 식히기엔 살짝 부족했기 때문이다.

교문사거리가 시아에 들어오면 오르막의 정점이다. 이제부터 한동안 내리막이 이어진다.

때문에 쉼 없이 달릴 수 있다.

언젠가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난 이 길을 뛰면서 그 이야기를 공감할 수 있었다.

오르막을 오를 때의 힘 겨움이 지나면 반듯이 찾아오는 내리막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인생의 마라톤에 지치지 않고 완주할 수 있는 것이겠지.

정점에서 교문사거리를 내려다볼 때 어제 만났던 그녀가 여전히 자전거를 끌며 올라오는 것이 시아에 들어왔다.

"헐! 또 보내 저 사람 진짜 뭐야?" 1년을 매일 같은 시간에 뛰었지만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사람을 연거푸 만나니 이번엔 인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이번엔 앞쪽으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손뼉을 치거나 하나, 둘 같은 구령을 넣지 않아도 되었다.

나를 의식한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내쪽을 잠시 보더니 길 옆으로 비켜서 내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또 보내요." 속도를 유지하며 그녀 옆을 스칠 때 인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했는데 내가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교문사거리 신호등을 가볍게 건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갈 때 또 한 번 그녀와 스치는 기회가 찾아왔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첫 마주침과 달리 오르막이라 이번엔 조금 천천히 곁을 지나치며 물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힐끗 쳐다볼 뿐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내 물음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녀가 조금은 얄밉기도 했지만 긴 한숨으로 애써 잊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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