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끄는 여자(#4)

by 서기선

차분히 내려앉은 새벽 공기 사이를 거친 숨소리가 비집고 들어가 길을 낸다.

이제 막 곁을 물리려 기지개를 켜던 어둠이 숨소리에 놀라 허둥거리며 자리를 물리면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히 그 길을 달렸다.

단지 재활을 위해 달리던 길이었지만 어느새 새벽공기의 달콤함에 흠뻑 젖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후~, 후~, 후~" 단숨에 오르막을 오른 나는 아래로 쭉 뻗은 내리막을 보며 거친 숨을 '후유~ 하고 토해내며 달렸다.

요 며칠 마주치던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인지하지 못했다.

이 길의 터닝포인트인 신호등이 가까이 보일 때였다.

신호등 건너편에 잠시 잊고 있던 그녀가 자전거를 세워둔 체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간밤에 일이 생각나 또 무슨 오해라도 살까 싶어 서둘러 신호등 쪽으로 달렸지만 내가 도착하기 전 신호가 먼저 바뀌었고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 모습이 보였다.

"에이! 좋았는데…. 막판에 이게 뭐야"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녀가 건너오기 전 신호등을 가볍게 건든 난 서둘러 뒤돌아 뛰었다.

하지만 안도하긴 일렀다.

뒤쪽에서 그녀가 날 불러 세웠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예? 저요?" 이미 날 향한 물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거짓된 물음으로 답했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그녀가 내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아뇨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하하!" 조금은 멋쩍은 웃음이었다.

그가 사과하기 위해 날 불러 세울 거라는 시나리오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당황한건 나였다.

그 때문에 말도 행동도 어눌해지며 평소 냉정했던 내 모습은 어디서도 없었다.

"이 길이 그쪽의 조깅 코스인가요? 전에도 우리 본 적 있지요. 비때…."

"예! 맞아요. 그런데 죄송해요! 제가 이제 곧 출근이라…."

이런 답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어눌하고 조금은 바보 같은 말을 하고야 말았다.

"앗! 예 그럼…." 무안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지만 실은 내가 더 무안했다.

어떻게 그런 말이 내 입속에서 튀어나왔는지 나조차 믿기지 않았다.

집으로 뛰는 발걸음이 내리막이었지만 무거웠다.

"아이 바보 같은 놈!, 병신…. 아이 쪽팔려" 뛰는 내내 다양한 표현으로 자책했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뭐!!! 야! 서대리 하하하!, 하하하! 너 어디 가서 나 안다고 말하지 말아라 아이고 창피해라!"

새벽에 있던 일을 이 대리에게 털어놓았지만, 돌아오는 건 이 대리의 놀림과 비아냥이 잔뜩 섞인 말뿐이었다.

"웃지 마! 나도 충분히 알고 있거든 실수라고 실수"

"그래 실수겠지 키득키득 아무리 그래도…. 아우 쪽팔려서 이제 너랑 같이 못 다니겠다."

이 대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너 자꾸만 놀릴래. 자꾸만 그러면 이제부터니 부탁 안 들어준다."

뒤돌아 웃고 있던 이 대리의 등에 대고 가벼운 협박을 하며 말했다.

"응 그래! 네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어떻게 수습이 안 되겠다. 크크 하하!"

이 대리가 비아냥거리며 웃고 있을 때 전무실을 지나는 김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김 과장이 이 대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눈을 치켜떴다. '제 왜 저러냐?'라는 물음 같았다.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지만,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대리의 의자를 발로 툭 툭 차며 마치 복화술을 하듯 "과장, 과장"하고 말하자 이 대리가 틀어진 몸을 바로 세우며 날아다니던 웃음을 거둬들이며 나직이 물었다.

"언제 왔냐?" , "조금 전에" , "에이 그러면 다 본 거 아냐! 또 찍히겠구먼!"

"그러게, 그만하라고 했지. 온다 온다."

묻고 답하는 사이 김 과장이 이 대리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재미있냐?"

짧은 물음이었지만 이 대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이 대리야! 널 어쩌면 좋니? 면접장 준비는 잘 됐는지 확인했어?"

"예! 지금 확인하겠습니다."

이 대리가 자기 머리 뒤쪽을 극적이며 말하자 김 과장이 '휴~'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갔다.

김 과장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이 대리가 허리를 펴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저 인간 그런 걸 왜 나한테 시키는 거야?" 씩씩거리는 이대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미스 강 퇴사했다며, 그럼, 누가 그걸 하겠냐? 너 아니면 나지, 그러게, 회식 때 적당히 했어야지…."

그러자 이 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 또 실수했어? 이번엔 뭐라고 했는데? 설마! 욕했어?" 사실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 전 놀림 받았던 것이 억울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인 양 행동하며 이 대리를 조롱했다.

"몰라!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 어휴~ 너 정말... 진짜 기억 안 나?"

자학하는 이 대리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지만 애써 참으며 말했다.

"면접 시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이 대리가 다급히 뛰어가는 것을 보니, 다문 입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점심시간 회사 건너편 편의점에서 커피 한잔을 구입한 내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잠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정장 차림으로 잘 차려입은 그녀가 회사를 나와 신호대기를 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회사 쪽으로 이어진 건널목이었기에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았지만, 그녀는 아직 나를 보지 못한 듯했다.

그녀가 길을 건너와 내 옆을 스칠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굳이 내 모습을 감췄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새벽의 부끄러움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숨을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너무 자연스레 몸이 반응했다.

'지나가라 지나가라' 마치 주문을 외우듯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이 근처에서 근무하시나 봐요" 눈썰미가 좋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굳이 모습을 감춘 나를 알아보고 그녀가 말을 걸었다.

"아~ 예~ 또 보내요" 천천히 묻었던 얼굴을 들어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딩~' 하는 동유럽 성당에서나 들릴법한 종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예쁘다!" 정리되지 않은 날것의 목소리가 미처 수습할 틈도 없이 흘러나왔지만, 다행히 그녀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예? 뭐라고요?" 그녀의 물음에 정신이 든 나는 이번에도 어설픈 물음을 하였다.

"자전거가 안 보니 내요"

"이런 복장으로 자전거는 아니지 않나요?"

짧은 대화가 이어질 때 55-1번 버스가 도착하였고 그녀가 서둘러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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