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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무게

by 서기선

하나의 문장을 쓰기 위해 커피를 몇 잔이나 식혔는지, 또 모니터 앞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인지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찌 나만의 일이겠는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문장 하나에 얼마나 많은 인고(苦)의 시간이 들어가는지를...

누구에게나 귀하지 않은 시간은 없다.

더욱이 창작자의 시간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독 속에서 흐르기에 남다를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문득 떠오른 마음을 한 편의 시로 만들기 위해, 문장을 앞을 붙였다가 다시 떼고, 뒤에 이었다가 또다시 지우는 작업을 반복한다.

단어 하나, 한자의 음과 뜻까지 공부해 가며, 내가 담고자 하는 세계에서 가장 어울릴만한 언어를 찾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단어가 눈앞에 떠오를 때의 전율은 다른 의미의 orgasm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누군가 그런 문장을 허락도 없이 가져간다면, 그것은 단순한 표절이 아니라 내 삶의 시간을 훔쳐 간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창작물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수많은 고민과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결실이기에 누구든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말이다.

얼마 전 등단소감으로 이런 말을 했다. 마치 자식을 세상 속으로 밀어 넣는 느낌이라고...

그만큼 소중하다는 은유의 표현이었다.

내 자식이 귀한 만큼 남의 자식 또한 귀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

내가 쓴 문장은, 내 발자국이자 고백이기에 그것을 지키는 일은 곧,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와 같은 생각이길 빌어보며 푸념 삼아 떠들어보는 것이다.

가치가 침해당하는 일이 없어야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표적인 예로 디지털 콘텐츠가 그렇다.

요즘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로 OTT시장의 문화콘텐츠를 중국이 무단으로 다운로드하여 시청한다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수 억 단위의 돈을 쓰고서 만들어낸 작품을 무단으로 시청한다면 제작자 입장에서 어떤 마음일지 이해는 하지만 아픔이 얼마나 클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것을 패러디해 마치 자국의 콘텐츠인양 만들어내는 모습이 혐오스럽다.

그걸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혹시 알면서도 손 놓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온 세상이 자국 이익 중심으로 흐르기에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이라면...

상대가 힘이 세다는 이유로, 보복이 무서워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마음이라면... 정령 그런 마음이라면...

그대는 부끄러운 겁쟁이다.

자식에게 그런 모습을 남기고 싶은가? 묻고 싶다.

이제는 표현해야 한다.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당신 안에 숨어있는 정의를 표현하길 바란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주제를 읽고 나와 우리를 위해 두서없이 떠들어 봤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작은 외침이 어느 마음에든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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