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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준 Feb 03. 2020

서른살이(living the thirties)

글 9

 누구에게나 약속된 시간이 있다. 20대 끝자락에서 나는 서른의 삶을 어렴풋이 고민했고, 서른한 살이 갓 되어서야 비로소 서른의 첫 번째 해를 살아갈 준비가 끝났다 말한다. 나에게 0은 시작이 아닌, 그저 20대와 30대 그 변화의 간격을 이어주는 0이기에. 인테르메조(intermezzo)가 끝난 지금, 이제 나에게 약속된 서른살이의 시작이다. 


 진부한 표현이 정확할 때가 있다. '짧지만 길었던' 한 챕터가 끝났다. 20대 끝자락에서 시작한 생애 첫 스타트업은 30대 출발선에 같이 오지 못하게 되었다. 여느 새해와 다른 한 살을 먹었고, 더 깊은 눈을 얻었다. 바라보는 곳에는 더 이상 그렸던 것들은 없으니 새로운 것들을 그려본다. 서른살이의 청사진이다. 새로운 것들을 그리기 위해 새로울 것 없는 다짐 몇 개를 꺼내본다. 항상 최상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항시 최고일 수는 없기에 신중하게 배치한다. 정합적이지 못한 부분들을 추려 다듬다 보면 다음 날이다. 문득, 이렇게 하루하루 그려나가는 것이 준비하는 과정인 동시에 완성해가는 것인가 싶다.


 다시 출발점에 서 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그 자리에서 몇 번 지우고 고쳐 쓴 청사진을 들고 다시금 시작해보려고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 씁쓸함이 조금 앞서있는 것, 그래도 두렵기보다 담담하게 앞을 볼 수 있는 것, 이것을 낡은 새로움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출발선에 서 있는 나만 닳아빠져버린 것인가. 익숙함과 새로움이 뒤범벅된 그 어딘가에서 문득 길 없는 곳을 걸어보고 싶어 진다. 

 

 어느 순간부터 견디는 일들이 익숙하다. '살다'를 '견디다'로 치환해도 무리 없이 읽히는 이유는 살아온 만큼의 무게들이 이제는 나를 밀어 '살아 나가게'하는 관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생의 어느 한 지점. 지나온 것들이 퇴적해 단층을 이루고 그 무게가 지층의 무늬를 만들어 내고, 나를 닮은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원치 않는 무늬를 강요받더라도 망막에 같은 무늬를 새겨 넣는 시기가 온다. 그 지점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는 쌓아 왔던 것들로 하여금 살아 나아가게 되어버린 것을. 지금의 나 또한 무늬 위로 눕고 있는 한 꺼풀임을. 그러기에 나는 삼십 대의 시간선 위에 얽매여 그 연속된 꼬리와 머리를 매듭짓는 하루살이(Lasting for a day)라 하겠다. 이제 나는 서른살이(Lasting for the thirties)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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