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5. 흰 종이를 검은색으로 물들여라 - 모파상
문득 글이 어렵다. 쏟아내고 싶은 것들이 많아질수록 그 것들이 뒤섞여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 조급해지고 결과물은 더 조악해진다. 글이 싫어지고 무서워진다. 학기가 시작하고 바빠지더라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 편정도는 글을 쓰리라 다짐했건만 엉망이다. 마음도 몸도 글조차도.
마음도 몸도 지쳐서 정적이고 싶을 때면 우울함이 고개를 든다. 그 우울함이 마음을 얼룩덜룩 물들일 것을 알면서도, 마치 세이렌(Seiren)의 노래처럼 끌려간다. 그러고는 마음을 온통 우울함으로 가득 채운다. 조용한 곳에서 누군가를 붙잡고 한 바탕 울고 싶어 진다.
지금의 나는 껍데기다. 무엇이든 생산해야겠다는 무의식적 목표만 있을 뿐 움직이기 위한 에너지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 나오는 결과물은 마음의 울릴 여력도 없다. 변명이겠다만, 이렇게 지쳐있을 때면 쓰고 있는 글들이 파란(波瀾 또는 Blue 둘 다)을 그려간다. 의도치 않은 색을 띤다. 글을 쓸 때 그 무엇이든 개의치 않지만 꼭 지키는, 이를테면 글쓰기 강령 같은 것이 하나 있다면 '긍정적인 글을 쓰자'이다. 글로써 상처받은 그대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그런 거창한 목표는 없다. 다만 안 그래도 힘든 그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 함께 둘러앉아 서로를 토닥이고 싶다.
서랍장에 이 글을 간직한지 어느새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왔고 다시 밝은 하늘이 보이고, 공책 위로 덮혀있던 그림자를 걷어내고 다시 흰 종이를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싶은 충동이 들면. 다시 시간은 흐른다. 하늘의 구름도 흘러가고 선선한 바람 한 줄기에 괜스레 마음이 울렁인다. 다시 글을 쓰려는 마음이 연분홍색으로 설렌다. 처음 글쓰던 곳과 환경도, 사람도, 계절도 다른 이 곳에서 다시 글을 이어보려고 한다.
여기는 호주 시드니.
어느 한적한 카페.
7월의 마지막 날.
다시 청춘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