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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소장 Oct 21. 2023

02. 희자 동우 그리고 희진

 희자는 오전 9시가 되면 부동산에 출근을 한다. 나태해지는 걸 막기 위해 출근시간을 스스로 정했다. 하루 일과의 시작을 문을 열고 빗질을 하고 바닥을 밀대로 닦는다. 벌써 10년째 루틴이다. 매일 청소하다 보면 딱히 더러운 건 없다. 습관이란 게 무서울 뿐이지. 

 우연찮게 가족들과 절에 간 적이 있었는데 빗질을 하던 스님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스님 두 분은 빗질을 열심히 하고 계셨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뭘 저렇게 열심히 빗질을 하는지 호기심에 다가섰다. “스님 뭘 그렇게 열심히 빗질을 하고 계십니까?” 스님들의 대답은 의외였다. 매일 마당을 빗질하는 것은 번뇌를 씻기 위한 수행이라 하였다. 시간이 흘러도 스님들의 그 대답이 기억 속에 남아 오늘도 희자는 실천 중이다.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 하는데 빗질 자체가 그 과정 일부인 것 만 같았다. 

 빗질을 하다 보면 잡념이 없어지는 데 문득 희진 씨가 생각난다. 희진의 첫 만남 역시도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생각했던 희자였다. 하지만 희진을 만나고 나서는 그동안 지켜왔던 생각들이 바뀌었다. 어쩌면 희진을 만난 건 우연과 필연 그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더 놀라운 건 희진보다 남편인 동우와의 만남이 먼저였다.  

             

 “안녕하세요. 좀 전에 전화 통화했던 서희자 소장님 맞습니까?”

 “박동우 사장님 맞으세요? 반가워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제가 전화로 이야기드렸듯이 이번에 A동 1004호를 경매로 낙찰받은 이동우입니다. 물건을 의뢰하기 위해 한번 방문차 연락드리고 찾아왔습니다. ”

 “축하드립니다. 젊은 분이 부동산 시장의 흐름을 잘 알고 계시네요. 경매란 게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어렵다면 어려운 분야거든요.”

 희자에게는 희진의 남편 동우와의 첫 만남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소개한 그는 평소에도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집이 특별나게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연봉이 높은 대기업도 아닌 일반 중소기업에 다니는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게 내가 아는 박동우다. 회사 직장 동료의 권유로 경매를 공부하게 되었고 첫 낙찰이었다. 하물며 처음이자 마지막 경매였던 것이다. 

 “서소장님, 초면에 이런 말 하기 실례지만 제 아내도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있어요.   지금은 장롱면허로 집에 잘 모셔두고 있죠. 아이들 둘을 키우다 보니 현재는 전업주부이죠, 한 번씩 공허한 눈빛을 보면 미안하더라고요. 제가 날아다니는 새를 새장에 가둬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들도 들더라고요. 혹시 이 부동산에는 실장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처음 보는 이의 청탁에 잠깐 당황스러웠다.

 “박동우 사장님,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편하게 동우 씨라고 부르면 되죠? 

 저는 이제껏 한 번도 누구랑 같이 일해본 적이 없어요. 이런 말 하면 초면에 섭섭하겠지만요, 저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편이에요. 그래서 누구랑 일을 같이 할 수가 없어요. 사기 한번 당해봐요. 사람을 믿고 곁에 둔다는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나 역시도 아파트 단지 앞에서 소소하게 욕심안 내고 일하고 있어서 실장이 필요하지 않아요.”

 동우는 순간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부동산을 다녀봤지만, 서소장이 주는 아우라와 그녀만의 무한한 신뢰가 희진을 이 분에게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앞섰던 것이다. 

 “서희자 소장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아내와 한번 더 같이 방문할게요. 그때도 지금처럼 편하게 커피 한 잔 그것도 부담스러우면 물 한잔 주셔도 됩니다. 제 아내지만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매물 잘 부탁드립니다. 연락 주십시오.”



 구름이 흐릿하고 제법 무거워 보이는 게 뭐라도 올 거 같은데. 오히려 지금 당장 함박눈이 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다.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난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조용한 하루였는데 첫 손님으로 부부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서소장님. 저 기억하시죠? 박동우입니다.”

 “어서 오세요, 동우 씨. 그동안 잘 지내셨죠? 어머, 혹시 그때 이야기 하셨던 아내 분 희진 씨 맞죠? 반가워요. 남편 분이 아내 분 이야기 많이 하셨어요.”

 때마침 눈이 오기 시작했다. 올 해의 첫눈이 오던 날 부동산 사무실을 방문한 동우네 부부. 예전에 동우가 소개해 주고 싶다던 아내 희진 씨를 만났다. 희진과의 만남이 그 해에 첫눈이 오던 날이라 그런지 다른 느낌으로 각인되었다. 

 “안녕하세요, 서소장님. 저는 김희진이라고 합니다. 동우 씨에게 서소장님 칭찬을 어찌나 하는지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서소장님을 만나보면 알게 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이렇게 막상 만나게 되니 멋져 보이고 좋습니다.”

 “아니. 동우 씨하고 희진 씨까지 이렇게 이야기하니깐 저 지금 너무 부끄러워요. 그래서 두 분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동우가 아내 눈치를 조금 살피더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서소장님, 아내가 어느 날 부동산 일을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를 먼저 꺼내더라고요. 전에 제가 얘기드렸던 부분도 있고 해서요, 긍정적으로 아내를 고려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동우 씨, 오늘은 두 분이서 저를 이렇게나 놀라게 하네요. 저는 그때 동우 씨가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저한테 말을 건넸던 거라 생각했어요.”

 갑자기 난감해졌다. 나는 이제껏 누구와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살뜰히 누군가를 챙겨 줄 입장도 아니었고.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구를 도와준단 말인가. 그런데 이상하게 희진의 두 눈을 보니 마음이 끌린다. 그 순간 내 입에서는 의도와 다른 말이 불쑥 나왔다. 돌이켜보면 지금도 그 순간이 신기할 정도다. 

 “희진 씨, 제가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내가 희진 씨 부동산 일 가르쳐 줄게요. 서툴 수는 있어요. 한 번도 누구를 가르쳐준 적이 없거든요. 대신 나에게 일주일의 휴가를 줄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부동산 일을 시작하고 쉰 적이 없어요. 부끄럽지만 여태껏 비행기 타 본 적도 없네요. 이 기회에 해외여행 가보고 싶어요. 그래줄 수 있겠어요?”

 “네? 넵. 서희자 소장님, 감사합니다. 제가 부족함이 많지만 열심히 일을 습득해서 서소장님 맘 편하게 여행 보내드리겠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출근할게요!”

 환하게 웃으며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사무실 문을 나서는 동우와 희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희진 씨를 보는 순간 일주일의 휴가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나도 모르는 내면의 진심이었나 보다. 여태껏 사람을 믿지 못했던 나였는데. 서서히 스며들 듯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의 빗장은 열리고 있었다.      

 

 사무실 앞에 누군가가 먼저 기다리고 있다. 가까이에서 보니 희진이었다.

 “어머, 희진 씨. 부동산 사무실 출근을 9시 전에 오면 어떡해?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나도 오전 9시면 일찍 출근하는 편인데. 우리 같이 편하게 일하자. 내일부터는 10시 넘어서 와. 얼른 들어가자.”

 희진은 약속대로 그다음 날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사실 나는 남편과 어제 해외여행 일정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본다고 늦게 잠들었다. 남편은 들떠서 우리도 이제 해외여행 간다고 좋아하는 눈치였다. 신혼여행 이후에 여행 일정을 잡아서 가는 건 처음이다. 여행은 사치라고 생각했으니깐. 남편은 해외여행이라는 타이틀보다 누구와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사람을 잘 믿지 않는 내가 사무실에 직원을 들였다는 게. 

 희진은 보기와 다르게 참 쾌활하고 씩씩했다. 네 살 터울이 있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전업주부이기 전에 직장생활도 했었지만 둘째가 태어나고 맡아줄 사람이 없어 일을 관뒀다고 했다. 주변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본인 스스로의 자격지심이었는지 어딘가 꼬였는지 잉여인간이라 느껴졌다는 것이다. “서소장님 아니었으면 우울증 걸렸을 거예요.” 고맙다고 해맑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넨다. 희진 만의 순수함에 순간 이끌린 거 같다.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희진의 재잘거림이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놓고 봤을 때 굴곡이 많았다. 산 길을 걸을 때면 어느 누군가는 숲의 울창함을 보는데, 나는 나무의 옹이들만이 눈에 들어온다. 옹이는 그 나무가 겪은 세월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보이는 수많은 상처 중의 하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처 없는 나무가 없다. 그런 부분은 사람과 나무는 꽤나 닮았다. 나는 옹이가 많은 나무인 것이다. 

 희진처럼 네 살 터울이 있는 두 아이의 엄마다. 둘째를 낳고 전전긍긍하며 직장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직을 강요당했다. 경영이 어렵다는데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때론 예감이 틀려도 될 텐데... 얼마 안 돼서 신랑이 하던 일은 친한 형님한테 사기를 당하고 우리 가족은 길거리에 내몰릴 뻔했다. 우연한 기회에 부동산 일을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앞만 보며 달렸다. 운이 좋았는지  부동산 일을 하면서 집안은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두 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학업에 열중했다. 때론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하루도 부동산 문을 닫지 않았다. 부동산을 찾아오는 손님이 그냥 돌아갈까 봐 휴일도 없이 출근을 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두 아이와 함께 가족 여행을 가볼까? 핑계라면 핑계겠지만 남편이 사기를 당한 이후에 먹고 사느라 바빠서 남들 다 가는 가족여행 한번 못 가봤다. 아이들 생각하니 이제야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느새 첫 째는 직장인이 되었고 막내는 대학교 졸업반이다. 이제 나도 조금 쉬어도 되지 않을까? 이 생각을 할 때 때마침 희진 씨가 눈앞에 딱 나타난 것이다. 희진의 눈동자에서 간절했던 그 시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외면할 수 없었기도 했다. 나의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난 것 같아 반갑기도 했고. 잘 가르쳐서 부동산 사무실 부탁하고 일주일만 가족을 위해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 갑자기 이상한 목표가 생겼다.    

  


 

 동우는 어젯밤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과 걱정은 뒤엉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느덧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 기대하는 아내에게 서소장님도 널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거짓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기대감에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 부동산 사무실 가게 되면 긴장하지 말고, 인사 잘하고 불필요한 말 하지 말고, 미소를 간간이 띠라고 당부를 했다. 예전에 서소장과 이야기했을 때 직원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자리에서 보기 좋게 거절당하면 상처받을 아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일을 상상하고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느라 꼬박 밤을 새운 것이다. 새로운 만남에 들뜬 희진과는 반대로 깊은 한숨이 쉬어졌다. 몇 년 전에 과감하게 끊은 담배가 생각이 났다. 

 두 아이의 가장이 되면서 지켜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겁이 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틀렸을까 봐. 혼자일 때는 부딪혀보고 시행착오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지켜야 할 것들이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두려워진다. 나는 소심한 겁쟁이는 아니었는데 한숨이 또 나온다. 한숨을 쉬고 나니 담배를 끊게 된 계기가 생각이 나서 헛웃음이 난다. 꾸준한 담뱃값 인상이 부담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둘이다 보니 소소하게 들어가는 돈이 꽤 컸다. 불투명한 앞날이 걱정되고 불안한 건 내가 지켜야 할 것이 생겨나서 그런 것일 테다. 그럴 때 피는 담배는 더 깊은 한숨과 연기를 내뱉게 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담배를 피우는 건지, 담배에 의존한 채 깊은 한 숨을 더 내뱉게 되는 건지. 담배 한 개비에 의존한 채 발목 잡히는 기분이 싫어 금연을 하게 된 것이다.

 지난 주말 가족들과 집 근처 놀이공원을 갔다. 아내는 놀이기구 중에 회전목마를 가장 좋아한다. 화려한 불빛 조명 아래 아름다운 멜로디와 함께 백마를 타면 동화 속 한 편의 주인공 같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연애 시절부터 희진은 놀이공원에 가면 시작과 끝을 회전목마로 마무리했다. 오늘도 역시나 아이들과 함께 회전목마로 놀이공원 시작을 알렸다. 아이들과 함께 각자의 말을 타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는데 차마 나는 함께 웃어줄 수가 없었다. “아빠 같이 타요.”라고 아이들이 제안을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내가 손을 흔들며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이 섬찟해 보였다. 아무래도 꿈 때문인 거 같다. 이 나이에 회전목마도 무서워해야 하니 앞길이 더 막막하다. 

 꿈속에서 나는 내리지 못하는 회전목마에 탑승을 했다. 밝고 화려한 조명이 아니라 찌지직 고장 난 불빛 아래서,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라 소름 끼치는 시끄러운 기계 소음이었다. 회전목마 주위로 환하게 웃어주는 관객이 아닌, 공포영화에서 섭외한 것 같은 무뚝뚝하게 지켜보는 시선들 속에서 나는 내릴 수 없었다. 앞을 향해 아등바등 삐꺼덕 달려가고 있는데 그 자리다. 처음에는 말에서 내려서 회전목마를 탈출하려고 노력했다. 말에서 내렸더니 마차에 올라타져 있고 또 다른 말을 타고 있다. 그럴수록 회전목마는 기분 나쁘게 더 빨리 돌았다. ‘넌 그래봤자야!’라고 조소하는 기분이었다. 체념이란 걸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지몽을 꾸는 것 같았다. 내 삶이 회전목마다라는 걸 일깨워 주는 거 같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항상 그대로구나. 꿈속에서 다짐한다. 나는 회전목마를 타지 않을 거라고. 

 아내는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살고 있고 외벌이로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버거웠던 것 같다. 꿈에서도 가위에 눌리는 걸 보면 말이다. 허우적거리는 늪에 빠지는 기분이 든 건 사실이다. 아내는 최근에 할머니의 죽음으로 심적으로 힘들어하고 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빈 공간을 더 느끼는 것 같다. 더 이상 지켜만 봐서는 안 되겠다. 아내를 데리고 서소장을 만나러 가봐야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의한 수를 두고 나왔다. 헤어질 때 이야기 말미에 아내랑 방문하겠다고 했으니 그냥 한번 가보는 거다! 


 조금 긴장한 표정이 있는 희진과 함께 부동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서희자 소장님. 저 기억하시죠? 박동우입니다.”

  “어서 오세요, 동우 씨. 그동안 잘 지내셨죠? 어머, 혹시 그때 이야기 하셨던 아내   분 희진 씨 맞죠? 반가워요. 남편 분이 아내 분 이야기 많이 하셨어요.”

  정말 다행이었다. 아내에게 티를 내지 않았지만 사무실 문을 열 때 가슴이 쿵쾅거렸다. 반갑게 맞이해 주셔서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고 아내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 뭔가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티 나지 않게 긴장했던 얼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아내와 서소장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루어졌다. 처음 서소장과의 대화에서 희진과 잘 맞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였다. 그리고 희진장점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아내와의 첫 만남도 그런 부분이 좋았었으니깐. 자연스레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희진 씨, 제가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내가 희진 씨 부동산 일 가르쳐 줄게요. 서툴 수는 있어요. 한 번도 누구를 가르쳐준 적이 없거든요. 대신 나에게 일주일의 휴가를 줄 수 있어요?...”

 서소장이 생각지 못한 제안을 아내에게 한다. 근데 아내는 고민도 하지 않고 해맑게 대답을 한다. 승낙의 의미인 동시에 서소장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들떠있다. 희진은 자격증만 있을 뿐이지 부동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맙소사! 하나가 해결되고 나니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꽤 많다. 부모님 두 분 다 일을 하셔서 집에 있을 때가 잘 없었지만, 그리 외롭지 않았던 것은 늘 나를 챙겨 주시는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할머니 친구분 중에 집을 지어 파시는 분이 있었는데 할머니에게 사기를 쳐서 우리 가족은 한순간에 쫄딱 망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제일 믿고 의지했던 사람한테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 아빠는 회사에 병가를 내고 며칠 동안 술만 마셨고, 할머니는 그 친구를 찾아다닌다고 돌아다니시다 밤만 되면 가슴을 치시면서 우셨다. 그리고 엄마는 일자리를 구해 밤낮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나는 일찍 애늙은이가 되었다. 집 안 사정을 알기에 철부지 어린이로 있을 수가 없었다. 투정을 부리지 않고 떼 한번 쓰지 않고 묵묵히 눈치 보며 커나갔다. 부모님은 그런 내가 안쓰러워하셨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엄마의 무게가 더 힘들어 보였다. 

 할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길을 잃은 느낌이다. 할머니가 정말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희진아, 왔니? 애들은 어쩌고 혼자 왔어?”라고 환하게 웃어주실 거 같았다. 어느 날 엄마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솔직히 별로 실감도 나질 않았다.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할머니와 지낸 날들이 뒤죽박죽 섞인 채로 뇌리를 스친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할머니가 믿었던 친한 친구에게서 부동산 사기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힘들지 않게 세상을 사셨을 거다. 아니면 그 일로 마음의 병만 생기지 않았다면 약을 먹지 않았을 거고 좀 더 오래 곁에 살아계셨을 텐데 말이다. 이제 와서 가정에 가정을 더 한다는 건 부질없다는 것도 안다. 고달픈 삶을 산 할머니를 추억하면 할수록 더 마음이 아파진다. 이제 적당히 아파하고 슬퍼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일어선다. 

 남편 동우는 내 생각과 달리 훨씬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힘들어하는 시간들을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그 사람의 상처를 겪어 보지 않고서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고작 곁에서 위로의 말 몇 마디 건네는 그뿐이라지만 조심스레 다가와 등을 토닥일 때는 마음의 치유가 된다.  


 요즈음은 말 수가 없어진 나를 배려해서 남편 동우는 일부러 더 장난 끼로 말을 건네고 농담을 한다. 

 “희진아, 장롱 속에 공인중개사 자격증 잘 있지?”

 “어. 좀 전에도 봤는데 깊숙한 곳에 자격증 잘 있는 거 봤어.”

 “그래? 다행이다. 내가 예전에 말했었지? 서희자 소장님 말이야. 일도 딱 부러지게   하시고. 느낌도 너랑 비슷해. 우리 와이프도 자격증 있다고 이야기했었거든.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하시더라고 어때 한번 만나볼래?”

 “정말? 그러면 우리 내일 가볼까? 나도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고 싶어 동우 씨.”

 어느 날 남편은 서희자 소장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일을 하고 싶을 때 한번 만나보자고 했었다.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황하는 시간이 더 길어질수록 나도 가족도 힘들어진다는 걸 안다. 다시 훌훌 털고 내일이라도 부동산 사무실을 찾아가 봐야겠다. 할머니가 늘 내 걱정을 했다는 건 안다.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젠 충분히 울었는지 눈물이 나지 않는 듯했다. 다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모처럼 잠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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