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에 대하여
참사 직후 그 현장에 있었던 희생자들을 탓 하는 여론이 많았다. 희생자들을 비난하는 악성 댓글이 넘쳐 흘렀다.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유가족들의 기자회견 요구안 가운데 여섯번째 요구는 이러한 현실을 담고 있다. ‘2차 가해를 방지하기 위한 입장 표명과 구체적인 대책의 마련'의 내용을 살펴보면 희생자들에 대한 2차 가해에 반대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2차 가해를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뿐 아니라 사회적 참사는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시민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우리는 희생자들을 탓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참사에 대한 고통에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신을 방어한다. 그리고 그 방어는 ‘놀러가서 참사 당한 것아니냐, 그러면 너희의 책임이다'라는 개인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식이며 이는 ‘나와 당신은 다른 사람이다'라는 타자화의 언어로서 드러난다. 나와 당신이 이 사회 공동체 같은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면 개인의 책임이라고 쉽게 단정 할 수 없다. 우리는 ‘타자화' 그리고 ‘배제'의 언어가 커져가는 것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토론을 열고자 한다.
‘6:34 그리고 122건’, 158명의 시민이 거리에서 죽음을 마주하기 이전에 거리의 위험을 알리는 최초 신고 시간 그리고 총 신고 횟수이다. 이 두가지 숫자가 드러나자 언론과 정부에서는 참사 4시간 전에 신고가 들어갔고 122건이나 신고가 들어갔으나 경찰은 대체 무엇을 했느냐며 일선의 경찰과 구급대원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 사이에 이태원서의 정보계장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며 일선의 경찰과 구급대원들이 구속을 당하고 조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은 역정을 내면서 현장의 책임자들에게 징벌적 책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 두가지 숫자를 현장의 경찰 그리고 구급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함으로만 쓰이는게 정의로운가. 이 두가지 숫자는 결코 개인의 책임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위기의 신호를 제대로 캐치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 시민안전에 대한 구조적 무책임을 겨누는 말이어야 한며, 더 근본적으로는 이 사회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우리가 동료시민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이야기 해야하는 숫자가 되어야 한다.
참사 직후 용산구청장, 행안부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들, 행안부 장관 까지 자신의 책임을 이야기해야할 모든 주체들이 변명과 회피로 일관하며 할수 있는 조치를 다 했는데 심지어 마치 어쩔수 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스스로의 무책임을 밝혔다. 세월호가 사고였을 뿐이라는 당시 책임자들의 발화들이 이야기가 오버랩되는 순간들이 지나왔다.
그 누구도 일상의 공간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정하고 살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 막연한 믿음은 ‘국가’ 또는 ‘사회’라는 무형의 시스템, 사회적 계약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제주도를 향하는 세월호에 탑승했던 이들도 ‘가만히 있으라’는 시스템을 신뢰했기에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은 탑승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시스템이 아니었고,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과정 가운데 수많은 시민이 분노했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국정농단이 드러나며 “이게 나라냐”는 질문과 함께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었고 국가와 정부의 책임을 물었으며 그 책임으로 대통령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 경험을 했다.
5년이 지나 정권이 교체되었고, 새로운 대통령과 그를 필두로한 세력이 정권을 인수인계 받았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나 또 참사가 발생했다. 하지만 6시 34분 그리고 122건이 보여주는 현실은 세월호 이후 8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렇게 다시 이태원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모습들은 어떠한가. 여당은 스스로의 책임을 이야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일선의 경찰관들 그리고 구급대원들의 죄를 묻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다. 86 그리고 개딸로 대표되는 야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참사의 정부책임을 이야기 하며 ‘윤석열 퇴진'을 외치고 있다. 반성을 먼저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위선을 부끄러워 하지 않아 정권을 다시 넘겨준 민주당도 연일 남탓 정치를 하고 있다.
한 편으로는 자신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한편으로는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든다. 정쟁을 하지 말라는것이 아니다. 갈등은 필요하며 균열을 통해 들어나는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은 우리를 다음으로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의 가운데에 있는 그 누구도 ‘나'의 책임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 사회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동료 시민들이 이렇게나 황당히도 죽음을 마주하였음에도, 그 누구도 내 책임이라고 이야기하는 이가 없다.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은 짙어지기만 하는 냉소가운데, 어떤 리더십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거대한 슬픔을 개인들이 위로하고 있다. 시민들의 가슴 속의 울분들을 담아낼 정치가 과연 존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정치는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체감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정치의 가장 큰 비극은 ‘산업화'의 열정과 ‘민주화'의 열정의 뜨거움이 2022년에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불모의 흥분상태가 되어 ‘시민'을 분리시키고 지워내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것이 지금의 것을 대표할 수 없음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것을 대표할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는 명확한 것같다. 기성의 권력에게 스스로의 결자해지를 기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기를 시작해야한다. 정치의 무능력으로 반복되는 참사를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변화가 불가능 하다라는 이 냉소를 어떻게 마주하고 어떻게 더 나은 사회를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에 쉬운결론을 내지말고 머리 맞대고 고민 해야한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세력으로서 모순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어떤 열정과 질문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마주할 것인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참사와 수 많은 죽음들 앞에서 불안함에 앞에서, 그리고 불평등이 심각하고 격차가 벌어지는 가운데 서 있는 우리는 한국 정치에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