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임
유달리 길게 늘어진 하루가 이제야 저물고 있었다. 해가 졌는데도 공기는 여전히 후끈했다. 이런 날이면 맥주 생각이 났다. 잠시 망설이다 핸드폰을 들었다.
[정이야, 통화 돼?]
한참이 지나서야 답장이 왔다.
[나 지금 이동 중이라 가능해. 고고]
“정아…”
“최수아 내가 필요할 때가 됐구만.
어디 보자, 나 여덟 시 반 이후로 가능. 어때.”
괜히 시계를 들여다봤다.
“참 너는 신기해. 나는 약속 한 번 잡으려면 2주 전에는 잡는데.”
“나야 뭐 즉흥적인 것도 좋아하고, 맨날 밖에서 살잖아.
무튼 이따 봐. 나 레슨 들어간다.”
정이랑 가끔 오던 이자카야였다. 예전 같았으면, 자리에 앉자마자 생맥주부터 시켰을 텐데.
“아. 주문은 이따 할게요.”
잠시 후 정이는 피곤해 보이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큰 가방은 한눈에 봐도 무거워 보였다.
“생맥 한잔이요. 아 수아 너는 뭐 마실래?”
“나 대신 마셔줘. 알잖아. 나는 대신 꼬치나 먹을래.”
“캬아아.”
맥주가 시원하게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목이 더 말랐다. 잔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다가 얼음물을 그대로 들이켰다. 속이 찌릿하게 식었다.
“이런 낙도 없어서 어떡하냐. 아직도 먹는 거 조심하지?”
나는 아직도 저염, 저당 식단을 고수했다.
“케이크도 떡볶이도 먹고 싶어. 미치겠다.”
언제쯤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안쓰러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될까.
“정이야 그거 알아?
나, 너한테 한 번도 갑자기 전화한 적 없는 거.”
정이는 대화창을 쓱 훑어보더니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냥 하지. 바쁘면 내가 보고 다시 할 텐데.”
나는 안주로 나온 완두콩 껍질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게. 너를 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전화 한 통도 어려워하네.”
그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안 받을 수 있지. 근데 그게 거절당하는 것 같고
바쁠 때 방해하는 걸까 봐.”
“수아야… 나한테 해. 언제든지 전화하고 보자고 해.”
그 말이 고마워 작게 웃었다. 짭짤한 완두콩을 쏙쏙 빼먹다 보니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꼬치가 나왔다.
“그 사람… 이제 안 나온 데.”
“무슨 일 있데?”
“몰라. 솔직히 후속 모임 한다는 것도 이상하긴 했어.
근데 이게 끝일 줄 몰랐지.”
“너 십 년 동안 이런 적 없었잖아.”
“아하하. 그러게. 술도 안 마시는데 왜 취하는 것 같지?”
시끌벅적한 술집 안, 튀김 냄새와 볶음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다. 사람들의 살냄새 같은 이야기들 사이로, 나도 조금씩 섞여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파닭꼬치가 제일 좋더라. 데리야끼를 먹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에.”
말없이 그을린 닭꼬치를 베어 물자, 정이도 맥주잔을 비워냈다.
“그때 보니까 네가 좋아할만하더라.”
“그동안 내 감정은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았거든.
아니다 싶으면 마음 정리하고.”
얼음 잔에 맺혔던 물방울이 흘러내려 테이블 위로 번지고 있었다. 물기를 닦자, 흐물 해진 휴지가 손에 들러붙었다.
“근데 그게 안 돼. 종일 생각나.”
“다가가 보는 건 어때.”
“내가 다가가면 더 멀어질 것 같아. 느낌이 그래.”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해 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요즘엔 여자들도 적극적이라더라. 다른 사람이 채간다.”
하늘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수십 번도 더 떠올려 본 장면이기에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시큰한 마음은 속일 수가 없었다.
“내가 눈에 들어오겠니.”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작아지기는 처음이었다.
“너 최수아 맞냐. 거울 봐봐. 너도 충분히 괜찮아.”
나 자체로 충분한 적이 있었나. 조건 없이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순간 모카가 떠올랐다. 내가 어떤 상태든 유일한 존재가.
“나 몸도 안 좋고 제대로 된 직업도 없는데.”
“넌 그 사람 아프다고 하면 싫어? 아팠었다며.”
하늘이 아프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저렸다. 오히려 그럴수록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순간 흠칫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 뭐라고 연락해.”
“그냥 자연스럽게 해 봐. 핑계를 대던가.”
머뭇거리다 그 사람과의 채팅창을 열었다. 내릴 스크롤도 없었다. 단 한 번 나눈 공적인 대화.
[잘 지내세요?]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보내기 버튼 위에서 계속 손가락이 멈췄다.
결국,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보냈어?”
“짠!”
나는 대답 대신 물 잔을 부딪쳤다.
“귀엽다 귀여워. 최수아. 진짜 사랑을 하려나 봐.”
“뭐? 무슨. 맥주 더 마실 거 아니면 가자.”
정이는 맥주 한 잔을 더 마셨고 나는 완두콩 몇 개를 천천히 씹었다. 정이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가, 그대로 흘러 나갔다.
“최수아. 알았지?”
“응. 그래.”
“너 분명 알았다고 한 거다?”
그제야 무슨 말을 했는지 되짚었다. 싱글벙글하며 내게 핸드폰 달력을 내밀었다.
“가을이야. 토요일 저녁. 기대된다.”
저번에 얘기한 연주회였다. 그래도 무대를 떠올리면, 이전처럼 숨이 막히진 않았다.
“살겠다 진짜. 나 2주 뒤에 버스킹 연습이 있다고 해서.
갔다 와 보고 말할게.”
언제나 내게 평범이란 단어는 사치였다.
평범한 가정, 평범한 직업, 평범한 연애.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이야.
나, 일찍 결혼하고 싶었어.
내 편을 만들고 싶었어.
세상에 나를 먼저 생각해 줄 사람.”
이유 모를 답답한 감정들이 이따금씩 울컥거리며 올라오곤 했다. 지난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 나부터 내 편이 되어 보려고.”
그때였다. 진동이 울렸다.
‘연락 올 사람도 없는데 뭐.’
이름 하나가 빠르게 스쳤다.
정하늘.
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