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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빈 Sep 26. 2022

찰나이기에 아름다운

일주일 사이 서쪽에 가야 할 일이 네 건이나 생겼다. 요즘 몇 가지 일로 힘든 내게 같이 바람 좀 쐬자고 한 안을 만나 수다를 떨고, 여유의 낭독극 공연을 보고, 고산에 있는 펍 요이땅삐삐에서 노래를 하고, 이소의 2집 앨범 중 한 곡에 피처링을 하는 일.


동에서 서로 횡단을 앞두고는 마음이 괜히 간질거렸다. 제주도로 여행 온 친구들은 아침에 애월에 있다가 저녁에는 성산에 있고 다음날 오전에는 중문에서 노는 일정도 무리 없이 소화하나, 이 섬에 육 년째 살고 있는 나는 이제 삼양에서 함덕으로 십오 분 가는 것도 주저한다. 그런 상황에 서쪽으로 한 시간을 넘게 가야 한다니. 불쑥 여행자가 된 듯한 기대감이 들었다.


애월의 인디언키친에서 안을 만났다. 집에서는 비건식을 먹으려 노력하고 밖에서는 딱히 가리지 않는 편인데, 인디언키친에는 채식인을 위한 메뉴가 있어 채소커리랑 난, 채소비리아니를 주문했다. 요리가 차례로 나오고 하나씩 음미하며 오늘의 한 끼는 채식을 했다는 약간의 뿌듯함도 같이 삼켰다.


안에게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 들쑤시는 느낌이 든다고. 안은 내 주변에 너처럼 뭔가를 많이 하는 애가 없는데 재미가 없다니! 하며 웃었다. 난을 북북 찢다가 그 말을 듣고 푸하하 웃어버렸다. 그러게. 나처럼 오만데 관심 두는 사람도 없지 싶은데. 몇 시간 동안 지금의 어려움과 향방에 대해 이야기했고, 식당을 나오는 길에 개인분석을 제대로 받아봐야겠다까지 생각이 다다르니 후련했다.


안과 함께 낭독극을 보러 책방 소리소문으로 갔다. 박완서 작가의 '그리움을 위하여'라는 작품이었다. 극 중 화자의 사촌동생은 열몇 살 차이 나는 남편과 결혼하여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게 하고, 아픈 남편 병시중을 하다가 여의지만 남편의 사랑한다는 한 마디에 남은 평생이 행복하겠다고 한다. 예순을 넘긴 어느 날엔 사량도라는 섬에 갔다가 돌연 교장선생님 같은 후덕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겠다고 했다.


사촌동생은 남자의 사별한 전 아내를 기리는 제사도 치르고, 폭풍이 거세게 치는 날 육지에서 그 남자와 통통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간다. 사촌동생의 계속되는 결단들에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며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 그는 모두 다 해냈고 종래에는 환하게 웃었다. 그를 향해 혀를 끌끌 찬 사람들에게 천진한 웃음으로 돌려주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누구도 그의 험준한 인생사를 안쓰러워할 자격이 없었다.

여유(기타 연주), 서청란 배우(화자 역), 고윤희 배우(사촌동생 역). 활자를 소리로 옮겨 들으니 무척 생생했다.


요이땅삐삐에서 공연하기 전에 아주 강렬한 노을을 보았다. 삐삐 사장님이 태풍이 오기 전의 노을은 이렇게 빨갛다고 했다. 길어야 삼십 분인 그 순간을 붙잡아보려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아름다운 광경은 금세 사라졌다. 늘 보이는 장면이면 식상할 텐데 하루에 딱 삼십 분 주어지는 찰나이기에 아름답다. 매일 시뻘건 하늘만 보다가 청명한 하늘을 삼십 분 볼 수 있다면 그 하늘을 향해 셔터를 누르겠지. 그동안 반복되는 일상은 얼마나 무심히 지나쳐 왔는지.


감사하게도 공연에 와주신 분들이 많았다. 서쪽에 오면 만날 수 있는 사람, 요이땅삐삐를 사랑해서 온 사람,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공연 마치고 바로 시내로 넘어가야 했던 사람, 친구의 제자인데 제주도에서 일 년 살이를 하다가 공연 소식을 보고 온 사람. 공연을 마치고는 우연히 한참 전에 일로 만났던 사람도 보았고. 만났다 헤어지는, 인생에서 찰나 같은 만남에 모두가 안녕하길 조용히 바라보았다.


소길리에 있는 한 작업실에서 이소 2집 중 '물결'이라는 곡에 피처링 작업을 했다. 코프로듀서 이디라마와 함께 한 2집 작업이 마무리 과정에 있는 듯했다. 같이 작업하면서 갖가지 고민들도 있었고 많이 다투기도 했다는데. 둘의 치열한 싸움이 작업 후반부에 들어 슬슬 소강되어 가고 있음이 무척 부러웠다. 다시 앨범 작업을 할 수 있을까. 다른 것보다는 여유랑 싸워야 일이 될 게 뻔하여 두렵다.


여하튼 서쪽에서의 바쁜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마음이 고이면 바람을 쐬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 발매하지 않은 우리 노래 중에 희극(가제)이라고 사랑하게 된 노래가 있다. 엉뚱한 상상으로 우주의 질서를 완전히 새로 써보고, 불쌍한 인생에는 혁명이 필요하고, 머리가 바쁠 때는 거리를 헤매고, 어깨가 축 처지면 날개를 달아보자는 가사가 나온다. 그래. 내 인생을 헤집어 놓을 아름다운 찰나를 조금씩 심어나가는 거다.


아래 영상은 올해 일월에 맞배집에서 부른 희극(가제). 아마도 이 노래를 처음 라이브로 불렀던 영상인 것 같다. 노래가 좋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데 여유는 미발매곡이라 알려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들키기 전까지만 조심스럽게 공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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