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사이 서쪽에 가야 할 일이 네 건이나 생겼다. 요즘 몇 가지 일로 힘든 내게 같이 바람 좀 쐬자고 한 안을 만나 수다를 떨고, 여유의 낭독극 공연을 보고, 고산에 있는 펍 요이땅삐삐에서 노래를 하고, 이소의 2집 앨범 중 한 곡에 피처링을 하는 일.
동에서 서로 횡단을 앞두고는 마음이 괜히 간질거렸다. 제주도로 여행 온 친구들은 아침에 애월에 있다가 저녁에는 성산에 있고 다음날 오전에는 중문에서 노는 일정도 무리 없이 소화하나, 이 섬에 육 년째 살고 있는 나는 이제 삼양에서 함덕으로 십오 분 가는 것도 주저한다. 그런 상황에 서쪽으로 한 시간을 넘게 가야 한다니. 불쑥 여행자가 된 듯한 기대감이 들었다.
애월의 인디언키친에서 안을 만났다. 집에서는 비건식을 먹으려 노력하고 밖에서는 딱히 가리지 않는 편인데, 인디언키친에는 채식인을 위한 메뉴가 있어 채소커리랑 난, 채소비리아니를 주문했다. 요리가 차례로 나오고 하나씩 음미하며 오늘의 한 끼는 채식을 했다는 약간의 뿌듯함도 같이 삼켰다.
안에게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 들쑤시는 느낌이 든다고. 안은 내 주변에 너처럼 뭔가를 많이 하는 애가 없는데 재미가 없다니! 하며 웃었다. 난을 북북 찢다가 그 말을 듣고 푸하하 웃어버렸다. 그러게. 나처럼 오만데 관심 두는 사람도 없지 싶은데. 몇 시간 동안 지금의 어려움과 향방에 대해 이야기했고, 식당을 나오는 길에 개인분석을 제대로 받아봐야겠다까지 생각이 다다르니 후련했다.
안과 함께 낭독극을 보러 책방 소리소문으로 갔다. 박완서 작가의 '그리움을 위하여'라는 작품이었다. 극 중 화자의 사촌동생은 열몇 살 차이 나는 남편과 결혼하여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게 하고, 아픈 남편 병시중을 하다가 여의지만 남편의 사랑한다는 한 마디에 남은 평생이 행복하겠다고 한다. 예순을 넘긴 어느 날엔 사량도라는 섬에 갔다가 돌연 교장선생님 같은 후덕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겠다고 했다.
사촌동생은 남자의 사별한 전 아내를 기리는 제사도 치르고, 폭풍이 거세게 치는 날 육지에서 그 남자와 통통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간다. 사촌동생의 계속되는 결단들에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며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 그는 모두 다 해냈고 종래에는 환하게 웃었다. 그를 향해 혀를 끌끌 찬 사람들에게 천진한 웃음으로 돌려주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누구도 그의 험준한 인생사를 안쓰러워할 자격이 없었다.
요이땅삐삐에서 공연하기 전에 아주 강렬한 노을을 보았다. 삐삐 사장님이 태풍이 오기 전의 노을은 이렇게 빨갛다고 했다. 길어야 삼십 분인 그 순간을 붙잡아보려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아름다운 광경은 금세 사라졌다. 늘 보이는 장면이면 식상할 텐데 하루에 딱 삼십 분 주어지는 찰나이기에 아름답다. 매일 시뻘건 하늘만 보다가 청명한 하늘을 삼십 분 볼 수 있다면 그 하늘을 향해 셔터를 누르겠지. 그동안 반복되는 일상은 얼마나 무심히 지나쳐 왔는지.
감사하게도 공연에 와주신 분들이 많았다. 서쪽에 오면 만날 수 있는 사람, 요이땅삐삐를 사랑해서 온 사람,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공연 마치고 바로 시내로 넘어가야 했던 사람, 친구의 제자인데 제주도에서 일 년 살이를 하다가 공연 소식을 보고 온 사람. 공연을 마치고는 우연히 한참 전에 일로 만났던 사람도 보았고. 만났다 헤어지는, 인생에서 찰나 같은 만남에 모두가 안녕하길 조용히 바라보았다.
소길리에 있는 한 작업실에서 이소 2집 중 '물결'이라는 곡에 피처링 작업을 했다. 코프로듀서 이디라마와 함께 한 2집 작업이 마무리 과정에 있는 듯했다. 같이 작업하면서 갖가지 고민들도 있었고 많이 다투기도 했다는데. 둘의 치열한 싸움이 작업 후반부에 들어 슬슬 소강되어 가고 있음이 무척 부러웠다. 다시 앨범 작업을 할 수 있을까. 다른 것보다는 여유랑 싸워야 일이 될 게 뻔하여 두렵다.
여하튼 서쪽에서의 바쁜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마음이 고이면 바람을 쐬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 발매하지 않은 우리 노래 중에 희극(가제)이라고 사랑하게 된 노래가 있다. 엉뚱한 상상으로 우주의 질서를 완전히 새로 써보고, 불쌍한 인생에는 혁명이 필요하고, 머리가 바쁠 때는 거리를 헤매고, 어깨가 축 처지면 날개를 달아보자는 가사가 나온다. 그래. 내 인생을 헤집어 놓을 아름다운 찰나를 조금씩 심어나가는 거다.
아래 영상은 올해 일월에 맞배집에서 부른 희극(가제). 아마도 이 노래를 처음 라이브로 불렀던 영상인 것 같다. 노래가 좋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데 여유는 미발매곡이라 알려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들키기 전까지만 조심스럽게 공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