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빈 Oct 15. 2023

여유와 설빈 3집 작업 기록 - 가을

지난 이야기

최종, 최최종, 최최최종, 진짜 최종, 이게 진짜 최종의 향연이다. 작업한 것들을 듣다 보면 갑자기 미세한 요소가 거슬려서 들어줄 수가 없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게 들린다. 밤사이 귀를 갈아 끼우는 걸까?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된다. 앨범 발매가 벌써 2주 앞으로 다가왔다.


곡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의견이 다를 때는 마음에 드는 것을 나서서 변호해야 했다. 난 이 느낌이 서툴지만 정직해서 좋아. 아냐 못 들을 정도야. 작업에 완전한 합의는 어렵고 다만 간극을 서서히 좁혀갈 뿐이다. 혼자만의 갈등도 잇따랐다. 정답이 없는 시험지를 계속 풀어나가는 기분이 든다. 왠지 정답이 있을 것 같단 말이지.


보석은 트럼펫 추가 녹음을 하러 제주에 내려왔다. 플루겔혼, 베이스 트럼펫, 트럼펫과 함께 여러 종류의 뮤트를 바리바리 챙겨 왔다.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악보노트에는 녹음할 곡의 트럼펫 라인이 적혀 있었다. 보석은 같은 라인을 다른 악기로 번갈아 들려주며 노래와 합이 맞는 소리를 찾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철저한 준비성을 보니, 처음에 남의 악기로 급하게 연주했던 게 얼마나 아쉬웠을까 싶어 미안했다.


램프 스튜디오에서 최종 믹스다운을 했다. 보통 여유와 경덕 둘이 작업할 때는 경덕이 ‘여유야, 이거 괜찮다.‘ 하면 여유가 ‘형, 아닌데.’ 했다. 마지막 작업날에는 거꾸로 여유가 ‘형, 괜찮은데?’ 하면 경덕은 ‘아냐. 다시 가.’ 했다. 둘이 고심하더니 아주 미세한 조정을 했다. 음량을 0.1씩 올리니 낮추니를 옥신각신하다 우리 너무 집요하네 하며 웃었다.


작업 초반에는 한 곡 한 곡 잘 살리기가 중요했고 후반에는 앨범의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려 고민이 많았다. 보조 프로듀서인 대봉은 우리가 지쳐 쓰러져갈 즈음에 함께하게 되면서 큰 힘을 주었다. 막혀있던 편곡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아이디어로 흐름을 터주기도 했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오, 저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말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면 안심됐다.


경덕과 셋이서 마지막 계절 사진을 찍고 소회를 나누었다. 아홉 곡 중 만족을 못해서 수록을 고민하던 노래도 있었는데, 곡들이 어느새 자기 색을 찾아 입었으니 다행스럽다. 스튜디오에 자주 오다가 마지막 날이 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동안 경덕의 너털웃음은 못 듣겠군. 멋쩍을 때 뿡! 하고 웃어버리는 익살스러운 표정도 못 보겠고.

계절 사진을 완성하는 날이 오네

경덕의 짝꿍인 경심이 최종 믹스다운을 기념하며 케이크를 만들어주어 조촐하게 음감회를 했다. 이번 작업은 경덕의 가족을 만나 더 특별했다. 작업 중 기가 막히게 당 떨어지는 타이밍을 알고 조용히 조각케이크를 내밀던 경심, 어느덧 마음으로 연결된 따뜻한 사람이다. 천천히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지웅, 자신을 괴짜 과학자라고 소개하는 지성, 이모~ 하며 늘 발랄한 얼굴의 지예. 사랑스러운 램프 식구들 모두 잘 지내.


피지컬 앨범의 디자인은 대봉에게 소개를 받아 하혜리 님에게 부탁드렸다. 혜리는 서울에 살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우리는 메일을 주고받다가 스케치가 나온 후에는 화상회의로 만났다. 혜리는 노래를 듣고 안개, 연기, 재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려주었다. 부클릿에는 지난 겨울에 찍어둔 필름사진이 들어가 있다.


마스터링은 서울 '소노리티 마스터링'의 이재수 님에게 부탁드렸다. 2집 때 함께했던 사람이다. 그는 만나자마자 더 피드백할 게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많이 듣고 자세하게 만졌다고. 그 자신감이 좋다. 옛날 포크 음악에도 쓰였다는 릴테이프 마스터링 버전도 준비되어 있었다. 릴테이프 버전은 특유의 따뜻한 노이즈가 음원 저변에 깔려있다. 함께 꼼꼼하게 듣는 시간을 가졌다.

대봉이 쫑긋하고 듣길래
나도 쫑긋

넷이 뭐 먹을까 하다가 대봉이 미슐랭 우동 맛집을 소개해서 갔다. 한 시간은 기다리며 얘기했는데 각자 타이틀곡을 어떤 곡으로 생각하는지도 나눴다. 난 2번. 난 6번. 난 타이틀은 하나였으면 좋겠어. LP로도 내게 되면 앞판에 하나 뒤판에 하나 있어야 되니까 앞판에 2번 뒤판에 6번 어때. 오~ 똑똑한데. 여유는 등에 멘 조립식 기타도 자랑했다. 조립식 기타는 수납이 간편해서 비행기를 탈 때 무척 용이하다.


이제 남은 작업은 피지컬 앨범 & 뮤직비디오 제작, 발매에 관한 일들이다. 대부분 예전에 같이 했던 곳에 믿고 맡긴다. CD 프레싱은 엠테크, 유통사는 포크라노스와 진행하기로 하였다.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했던 곳이랑 다시 하다 보면 그동안의 궤적을 짚어보게 된다. 우리의 발자국이 이런 모양이구나 하고.


여유와 설빈 3집 [희극]은 제주에서 출발했다. 올해 1월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사계절의 감각과 애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작업 기간은 1년이 되어가지만, 그간 이곳에서 7년 가까이 생활하면서 우리를 보살펴준 많은 이들과 섬의 기운이 노래에 스며있다. 홀로 됨을 느끼며 쓸쓸함이 온몸에 엉겨 붙는 날도 있었고, 나 아닌 대상과 어우러지며 아파하기도, 덕분에 치유되기도 하였다.


[희극]은 그동안의 기록이다. 떠나간 배를 바라보다 꽃 한 송이를 피워냈다. 주정뱅이 잉여인간이 되어 떠들고 떠돌았다. 애써 눈물을 삼키고 괴물을 꼭꼭 숨겼다. 밤하늘의 별들처럼 밝지 않아도 바람 부는 날의 촛불처럼 살아있다. 이번 작업에 참여하는 모두가 괜찮은 앨범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정성을 다했다. 애써준 동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