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방울토마토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상추는 꽃대가 올라오고 씨앗을 채종했다. 오이는 아이들과 검질 매다가 수분 보충한다며 자주 쪼개 먹었다. 가지는 사람보다 벌레가 더 많이 먹은 것 같다. 로즈마리는 빛이 과했는지 타들어가서 정리하고 텃밭의 한가운데에 회화나무를 심으려고 한다. 수박은 이제야 열매가 맺혔는데 볼 때마다 짙은 녹색 줄이 선명해진다.
초당옥수수 1차 수확량은 스무 개 정도였다. 아이들이 촘촘하게 박힌 옥수수알을 하나씩 떼어먹으며 행복해했다. 4개월 기다림 끝에 맛보는 달콤함. 따로 약을 치지 않으니 군데군데 벌레 먹은데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대성공이다. 수확한 것들은 활동발표회 때 다 같이 먹으려고 쪄서 얼려두었다.
활동발표회 리허설은 텃밭에서 두 번, 상담실에서 세 번 했다. 텃밭에서 하기를 가장 바랐지만 우천시를 대비해야 했다. 진행을 맡은 아이들이 대본 초안을 작성했고 리허설을 하며 감상을 나누었다. 네 번째 리허설 때는 전체 대본을 출력해서 각자 퇴고 과정을 거쳤다. 힘을 모아 함께 텃밭을 만든 것, 쎄빠지게 잡초 뽑은 이야기, 작물을 수확할 때의 짜릿함 등 열심히 살을 덧붙여 나갔다.
활동발표회 D-7. 일기예보에 활동발표회 날짜를 포함하여 전후로 비 그림이 가득했다. 3학년들이 긴급회의를 했고 상담실에서 발표회를 하기로 정했다. 텃밭에서 하게 될 줄 알고 풋살장 펜스에 사진을 널어보기도 했었는데, 실내로 바뀌게 되어 사진을 폼보드에 붙여 전시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대망의 활동발표회날. 텃밭에서 작물들을 하나씩 가져와 잘 보이게 배치했다. 오이, 물외, 고추, 가지, 초당옥수수, 삼색이 강낭콩, 라벤더, 골든레몬타임, 로즈마리, 페퍼민트, 스피어민트, 깻잎, 상추. 전부 풀씨 아이들이 정성으로 가꾼 것들이다.
초당옥수수, 방울토마토, 고추, 오이는 손님들이 맛볼 수 있게 준비했다. 많은 사람들이 풀씨를 응원하러 방문했다. 아이들이 보람찬 얼굴로 리플렛도 나눠주고 작물 자랑을 했다.
리플렛에 담긴 소개글
풀씨들의 텃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올해 3월만 해도 이곳은 폐보도블록과 돌들이 널브러진 빈 땅이었습니다. 이곳을 가꾸기 시작한 건 30여 명의 생태환경 동아리 '풀씨'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밭을 디자인하고, 폐보도블록과 돌을 들어 나르며 함께 꿈꾸던 밭을 만들었습니다. 땅을 고르고 10가지가 넘는 작물들을 심어 매일 살피고 있지요. 검질을 매면서 수많은 벌레와 공생하는 법을 배우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작물들을 돌보며 노작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풀씨들의 텃밭은 순간순간의 손길들이 더해져 가꾸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힘이 남아돌아서 삽질하며 땅을 고르고 연못을 만들었고, 많은 선생님이 없는 짬을 내어 무수한 잡초를 뽑고 작물을 키우는 노하우를 전수해 주었습니다. 이토록 여럿의 정성으로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이곳에서, 앞으로도 즐거운 행진을 차근차근 이어나갈 것입니다.
김, 이, 남 세 명이 발표회의 진행과 활동 소개를 맡았다. 월별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사진들과 함께 찬찬히 짚었다. 실천탐구 프로젝트 소개도 있었다. 한은 생태연못을 만들며 90퍼센트는 삽질을 해야했는데 PPT에는 삽질하는 사진이 한 장뿐이라 아쉬워하며, 생태연못에 기울여온 정성을 열렬하게 설명했다. 다른 아이들의 소감도 이어졌다. 친구 따라 텃밭 구경 왔다가 동아리원으로 눌러앉은 이야기, 무거운 돌을 옮기고 밭을 만들면서 이게 될까 싶었던 것들이 다 되고 있어 신기하다는 이야기.
동아리 회장인 김은 활동발표회가 끝나고 한 선생님의 고생했다는 한마디에 긴장이 풀려 눈물을 펑펑 흘렸다. 김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풀씨 활동도 열심히 하고 매일 오케스트라 연습도 열심인, 열심 그 자체인 아이다. 그 열심에 다정한 답장을 받은 것이다. 홀로 많은 걸 잘 해내고자 하는, 그 마음의 어려움을 알아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여러 선생님이 활동발표회 후기를 들려주었다. 누구는 반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인데 오늘처럼 반짝이는 모습은 처음 본다. 누구는 발표불안이 많은 아이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발표를 잘하다니. 아이들 서로가 다독이고 응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이들이 풀씨 활동을 하면서 자기 존재 의미를 찾고 있는 것 같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지지 속에 활동발표회가 성황리에 끝났다.
1학기의 마지막 모임으로 비건 요리 워크숍을 했다. 텃밭에서 수확한 작물들을 활용하여 식사류로는 들기름 메밀면과 토마토 커리를, 음료는 복숭아 에이드를 만들었다. 반응은 다양했다. 비건 요리는 맛이 없을 거라는 막연한 거리낌들이 허물어진 아이가 있는 반면 여전히 채소만으로는 진입장벽이 높게 느껴진다는 아이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비건 요리 만들기에 임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공동체의 힘을 실감했다고나 할까. 한 학기 동안 함께 일하는 게 몸에 밴 아이들은 과제가 있으면 뭐든 같이 해보려 했다. 칼질이 서툰 동생을 위해 시범을 보여주고, 양파를 볶을 때 눈이 매우니 교대해주려고 하고, 설거지에 당첨되어 울상인 친구에게 자기도 설거지 전문이라며 달라붙었다.
아이들은 작물을 길러 수확하는데 재미를 붙이고 점심시간마다 만나 서로 친해졌다. 풀씨 활동을 매개로 자연과 연결되고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끈끈해진다. 5월 쯤이었나, 생태연못에 부레옥잠을 두 송이 띄웠는데 지금은 아홉 송이가 됐다. 처음 만들 때만 해도 5cm 아래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15cm 아래까지 보일 정도로 정화가 되었다. 올챙이는 장구벌레를 먹고 수련은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2학기에 우리는 또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