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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Nov 09. 2020

영화롭게 말걸기

호우시절

불가용어에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뜻이다.

흐드러지는 경향이 있기야 해도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상당히 좋아한다. 이를테면 영화 '호우시절'과 같은 . 사실 정우성이란 배우에게 내내 외모로든 연기로든 그닥 감흥이 없다가 영화 '호우시절' 덕분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호우시절' 이라는 영화 제목은 두보의 시에서 가져온 구절로 '때마침 알맞게 내리는 비'를 일컫는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라고 시작하는 이상은의 노래를 가끔가다 흥얼거리고는 하는데 영화 '호우시절'을 보며 그 곡의 가사를 떠올렸다. '우리 그때'가 사랑이었음을 왜 '그때 우리'는 알지 못했을까. 세월이 흘러 운명은 둘을 다시 마주하게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그때는 다만 시절인연이었을 뿐이다. 때마침 내리는 비는 '다시 사랑'이 아닌 사랑이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인정하게 한다.

추억이 아름다운 건 추억의 시제가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내준 자전거를 타는 그녀가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의 영속성이나 항상성을 덥썩 믿을만큼 더이상 순진하진 않아도, 시절인연이 건네주는 추억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연륜은 숙성되었다. 그러므로 이별이 남기고 간 아픔의 질량은 여전하겠으나 아픔의 상미기간은 점점 짧아져가고 그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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