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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Oct 29. 2020

영화롭게 말걸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환상의 빛>


<환상의 빛>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1999)에 앞서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1995)로, 그것도 일본어 원서로 먼저 만났다. 이 작품의 한글 번역본을 읽어보진 못했으나 아마도 번역가가 상당히 고심을 했을듯 하다. 간사이 사투리도 사투리지만 그 만큼 이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뒤를 잇는 서정 소설가, 미야모토 테루' 라는 평답게(물론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결이 전혀 달라서) 언어가 여명 아래 염전의 소금처럼 반짝이는 작품으로 심지어 이 소설에서 쓰인 간사이 사투리가 너무나 좋아서 어떤 구절들은 몇번이나 소리 내어 읽었을 정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원작 소설(심지어 단편임)을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스크린으로 옮겨와 결국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는 호평과 함께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 수차례 수상을 하게된다.

첫사랑과 결혼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유미코는 아들을 낳은 지 얼마 안되어 남편을 황망하게 잃는다. 그런 유미코의 심리를 빛과 어둠을 영민하게 이용해 담았는데, 특히 영화 마지막에 유미코가 새로이 시작된 일상(삶) 밖으로 자기를 데리고 갈 버스에 끝내 오르지 않고 자기의 일상(삶) 안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합류하게 되는, 아주 길고 느린 롱테이크 샷으로 찍은 장례 행렬 장면은 고요한 파문으로 일렁이는 호수처럼 두고두고 가슴에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을 떠올린 장면이기도 하다.

늘 슬픈 쪽은, 슬픔이란 감각을 껴안고 사는 쪽은,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生이라는 線 밖으로 사라져간 이들의 '사라져야만 했던 이유'를 찾아 줄곧 헤매인다. 어쩌면 평생을 명치를 쪼개는 뻐근한 부채 의식 속에서 방황하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 이별과 단절, 그리고 죽음은 단어의 모양만 다를뿐 살아남은 이들에게 지워진 짐의 무게는 적어도 남은 생의 무게만큼 무겁다. 무엇보다 더이상 그들에게 죽음의 이유를 캐물을 수 없어 치명적이며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이들에겐 살아남은 자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조차 없다. '왜'라는 1음절에 담긴 복잡한 심경은 음향이 소거된 메아리가 되어 철썩철썩 나를 치고 갈 따름이다.

사는 일의 곡진함은 때로 스스로를 극한의 피로로 몰고간다. 그 피로로부터 구원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건 결국 나 자신의 몫이다. 너에게 목소리를 건네는 일,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수고로움을 자처하는 일의 의미를 떠올린다. 유미코가 장례 행렬을 따라 돌아오는 장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길을 걸어가는 행위의 주체는 나일지라도 '함께'를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사람의 일임을 보여준 건 아닐까. 죽은 사람은 침묵한다. 그를 휘감고 사라진 환상의 빛이 어떻게 그에게 다가왔는지 알 리 없고 어쩌면은 언젠가 내게도 찾아올 지 모른다. 바다를 향해 낸 창문으로 들이치는 건 햇빛이나 달빛만이 아니며 방을 고드름으로 채울 바람의 울부짖음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창문을 닫을 줄 안다. 커튼을 드리우고 난로에 석유를 채울 줄 안다. 그 모든 행위가 사는 일임을 우린 기억해야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이어 도래한 암전을 바라보며 리처드 용재 오닐이 연주하는 다소 과하리만치 구슬픈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소나타'를 플레이 시키고 한때 내 삶에도 드리운 적이 있는 환상의 빛을 떠올리며 조금 울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에게 슬픔만 남아있는 건 아니라고, 내가 지금 이 곳에서 숨을 쉬며 커피를 내리고 슈베르트를 듣는 모든 일이 살아 남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너를 사랑하고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일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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