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어떤 인과

by 자하

나에게는 불안이라는 오랜 친구가 있다. 불안이 친구라니, 별로 공감되는 비유는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나에게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내게 불안은 동화 신데렐라 속 계모나 단잠을 자던 중 울리는 알람 같은 존재니까.


나는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다.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과는 좀 많이 다른 의미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나 갑자기 울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 정신없이 쏘아대는 불빛 등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자극에 불안감을 느낀다. 일상생활을 하던 중 예기치 못하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나의 불안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친구가 언제부터 나와 함께였는지 알지 못한다. 그걸 알기엔 너무나도 오랜 기간이 지나버렸다.


사실 이 불안은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다. 불안이 신체화된 지경까지 이르러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유 없이 심장이 빨리 뛰거나 호흡이 가빠진다. 잘 자다가도 심장이 빨리 뛰고 갑갑해져 깨버리기 일쑤다.


“이게 바로 부모의 일관된 양육 태도가 중요한 이유예요.”


하루는 이 불편을 어떻게 좀 해결해 볼까 싶어 병원에 갔는데, 내 이야기를 들은 상담사가 이렇게 말했다. 내 불안도가 높은 것이 단순히 내 기질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였다.


나는 어렸을 적 일관적이지 않은 양육 태도를 가진 부모의 아래에서 자랐다. 기분에 따라 행동하고 때론 내 잘못이 아닌 문제에 대해서도 나에게 화풀이를 하던 아버지에게서 자라났으니 불안이 만성화된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특히 휴식을 취하거나 자는 중에 불안의 신체화 증상이 강하게 올라오는데, 그건 몸이 휴식 시간을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천둥처럼 내리 꽂히는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게 방심하는 순간에 터지곤 했으니까.


“전형적인 자율 신경 실조네요.”


상담사와의 대화에 이어 의사 역시 말했다. 불안해서 나타나는 신체 반응, 즉 심장이 빨리 뛰거나, 땀이 나고, 호흡이 가빠지는 등의 반응이 오랫동안 반복되며 만성화되다 보니 실제로 불안한 일이 없어도 불안을 느낀 양 몸이 반응을 한다는 거였다. 의사의 말대로 나는 불안한 일이 없어도 불안한 양 몸이 반응하곤 한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빨리 뛰는 탓에 불안이 뒤따라오는, 참 특이한 인과 역전 현상을 겪고 있다.


그래서랄까, 나에게 좀 독특한 습관이 생겼다. 휴식 시간에 불안이 찾아오곤 하니 웬만하면 휴식 시간을 만들려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게으름을 부리고 널브러져 있으면 그때부터 스멀스멀 불안이 뱀처럼 기어 온다. 나는 불안을 피하려 몸을 움직인다. 주로 글쓰기를 하고, 산책이나 외국어 공부, 청소를 하기도 한다. 불안 덕에 얼떨결에 성실한 사람이 된 셈이다.


불안에서 시작된 이상한 인과는 이것만이 아니다. 내 불안은 너무나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대학생 때도 함께였는데, 그땐 조금 더 심해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그땐 무려 우울증도 함께였다.) 나는 두 번의 자퇴를 거쳐 세 번째 시도 만에 4년제 대학교 수료증을 얻었다. 불안과 함께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냈던 것 같다.


내가 포기한 첫 번째 전공은 중국어였다. 한 학기 만에 경제적 문제와 정신 건강 문제가 겹쳐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책을 읽게 된 계기라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처음엔 병세가 좋지 않아 한 줄을 몇 번씩 읽어도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책 한 권을 읽는 일도 가능해졌다. 그렇게 나는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번째 전공인 문예창작은 조금 더 오래 공부했다. 내가 불안과 우울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방법이기도 했고, 글 한 편에 매달려 있다 보면 잠시나마 불안과 우울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복수 전공으로 일본어를 선택하는 패기까지 보였다. 물론 또 한 번 불안과 우울에 져 자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도 문예창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공이 되었다.


세 번째 전공은 심리학이다. 대학교에 다시 입학하지는 않았고, 학점은행제로 공부했다. 이전에 학교를 다닌 전적이 있는 데다 온라인 수업이라는 점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졸업장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문학에 관심 있는 나로선 심리학 역시 상당히 흥미로운 학문이었다. 일반 대학교 졸업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나는 4년제 학위를 얻었다. 여기까지가 내 최종 전공이 심리학이 된 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내가 한 전공을 꾸준히 공부해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대신 중국어와 문예창작, 일본어, 심리학을 한 번씩 건드려본 사람이 된 것이다. 진짜 전공자만큼 깊은 지식을 가진 건 아니지만 실제로 나는 일반인 수준에서 관련 상식이 높은 편이다. 얼떨결에 얕고 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참으로 신기하고도 연결하기 힘든 인과다.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말하면 ‘나는 어렸을 적 양육 환경이 불안정해 잡지식이 많은 사람으로 자라났다.’가 아닌가. 물론 그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정리하자면 그렇다. 어떤 일을 겪든 무조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기만 하지 않다는 결론은 희망적이다.


물론 모로 가든 결과만 좋으면 장땡이라는 주의인 건 아니다. 굳이 고르자면 나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나쁘다고 해서 나중에도 고통받으리라는 비관은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럽지 않나? 그보단 언제고 지금의 고통이 좋은 일로 돌아오리라 믿는 편이 행복에 더 가까워질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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