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지속 가능한 음주

by 자하

주말엔 오랜만에 K와 D를 만났다. K와 D는 고등학교 때 친구로, 지금까지도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는 친구들이다. 여행도 같이 다녔고, 생일도 챙겼다. 주량을 모르던 시절엔 “다이다이 떠 보자”는 유치한 내기로 왕창 마시고 함께 쓰러져 보기도 했다. (찐한 흑역사 항시 소지)


그러나 의외로 우리가 함께 술을 왕창 마신 날은 많지 않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K와 D 외에도 B가 보통 함께 모이는 멤버인데, 일단 B는 소주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새빨개진다. 몸에 직접적으로 탈이 나는 건 아니지만 누가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더 먹이면 내가 나쁜 인간이 되는 기분을 견딜 수가 없다.


D는 비슷하지만 좀 다른 경우다. D는 일명 알쓰로, 어울려서 실컷 마시고 즐기고 싶은 것과 별개로 몸이 따라 주질 않는다. 나는 이런 몸을 가성비가 좋은 몸이라고 부르는데 D는 자신의 가성비 좋은 몸을 좋아하지 않는다. 맨날 더 마시겠다고 우기다가 차단당한다. 이십대 초반 D의 술버릇에 호되게 당한 이후 나는 취한 사람의 뒷감당을 도맡는 일이 귀찮아졌다. 아무리 억울하다 안 취했다 징징대도 들어주지 않는다. 남들 멀쩡할 때 혼자 취해버린 인간 말은 믿지 않는 것이 옳다.


이렇게 되면 제대로 각 잡고 마실 수 있는 건 K와 나, 둘만 남는다. 벌써 생존률이 50퍼센트로 떨어졌다. 이쯤 되면 마시기를 포기하게 된다. 술이 몸에 받지 않는 B를 앉혀 놓고 콜라만 마시게 하기도 뭣하고, 의지의 알쓰 D만 못 마시도록 따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나는 월요일 아침에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한 주의 컨디션을 전부 망친 듯한 우울감에 빠진다. K도 다음날 일찍 출근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음주를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나? 그런 일은 없다. 우리는 술자리를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고안하게 된다. 낮술을 하자. 일찍 취하고 일찍 깨버리면 서로 부담 없는 거 아니야?




약속 시간은 일요일 오후 2시로 정했다. 실컷 놀고 헤어져도 다음날 출근에 지장이 없도록 하자는 계획이었다.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고 술을 마시기로 한 것도 오랜만이라 만난 시점에 이미 다들 텐션이 높았다. B가 바빠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으므로 술을 마시고자 하는 의지도 만땅이었다. 비장한 얼굴로 잔을 돌렸다. 암호라도 전달하듯 시선을 주고받았다.


“소맥이지?”

“당연하지.”


소맥 제조 담당 K가 소맥을 말았다. 거품 제조 용도의 숟가락까지 구비해 두었으니 준비도 만반이었다. 비율은 소주 1에 맥주 1……?


“미친 거 아니냐?”

“아니, 손이 미끄러졌어.”


그러나 한번 잔에 따른 소주가 다른 잔으로 옮겨 가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공평해야 한다는 논리가 펼쳐졌고, 나머지 잔에도 같은 비율로 소맥이 말아졌다.


“소주맛이 너무 강한데?”

“좀 마셔 봐, 맥주 더 따라 줄게.”


D가 인상을 쓰자 K가 병맥주를 집어들었다. D에게 잔의 3분의 1 정도를 마시게 한 뒤, 빈 공간을 맥주로 채웠다. 또 한 번 나머지 잔에도 공평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K와 나도 똑같이 3분의 1을 마셨고, 똑같이 빈 공간을 맥주로 채웠다. 순식간에 맥주 한 병이 동났다.


“얘들아, 우리 지속 가능한 음주를 하자. 이렇게 마시다가 골로 가겠어.”


내가 말하자 다들 동의의 뜻으로 끄덕였다. 아직 2시 반이었고, 주변이 아주 밝았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도 않아 퍼져 버릴 터였다. 다음날이 힘들어진다면 일찍 술자리를 시작한 보람이 없었다. 그러나 일단 술이 들어간 이상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리가 떠들어대는 만큼 병들도 빠르게 쌓여 갔다. K의 전남친과 전전남친, 최근 구매한 향이 구린 방향제들, 언니들이 가르쳐 준 폭탄주 제조법…… 이야기는 이리저리 튀었다. 어느새 테이블엔 소주병 3개와 맥주병 4개가 놓여 있었다.


“아직 괜찮지?”

“아직 괜찮아!”


우리의 의지는 확고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고, 흥이 오를 만큼 올랐다. D의 눈이 풀려 있는 것이 보였지만 아직 한낮이었으니 깰 시간은 충분했다. D는 흥얼거리며 근처 편의점에서 마이구미와 박카스 맛 젤리, 복숭아 홍차를 사 왔다.


“이렇게 먹으면 맛있대.”


D는 소주에 젤리를 빠뜨리고, 복숭아 홍차를 부어 섞었다. “섞어 마시면 더 빨리 취하는 거 아니야?” 물었는데 “술이 아닌 걸 섞으니까 도수가 더 낮아지는 거 아니고?” 되물었다.


“어, 그렇게 되나? 그럼 지속 가능한 음주가 되겠다!”


우리는 마주본 채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찌 됐건 오늘 모임의 목표는 ‘지속 가능한 음주’였다.


“지속 가능한 음주를 해야지. 저녁까지 쭉……!”


우리는 맥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소주가 아직 남고 맥주가 부족했으니 균형을 맞춰야 했다.


“그럼 소주랑 맥주가 딱 떨어질 때까지만 마시자. 딱 맞게 떨어지면 거기서 미련 없이 끝!”

“끝!”


K가 잔에 소주를 부었다. 잔의 반 정도가 찼지만 취기가 오른 우리 중 누구 하나 지적하는 이가 없었다.“근데 이젠 소주가 부족할 것 같지 않아?” 내가 물었다. 해가 지도록 음주가 지속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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