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삶.
제 삶에 글이 함께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맞춤법조차 자주 틀리던 제게
글쓰기는 늘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였습니다.
이공계생으로서, 글보다는 숫자와 연산을
우선시하던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자신을 마주하며
가장 먼저 손에 쥔 것은 바로
‘지금의 나’를 기록하는 일이었습니다.
글은 저를 더 넓고, 더 깊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라도 제가 글과 닿게 된 것은,
참 기적 같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유년 시절 IMF 금융위기를 겪으며, 일명 빚쟁이라 불리는 채권자들이 집으로 자주 전화를 걸어오곤 했습니다. 성함을 대며 부모님을 찾는 그 전화에, “우리 부모님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했던 저희 형제를 지켜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요.
돈이 만들어낸 불균형은 두 분의 관계마저 멀어지게 했습니다. 부모님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지금과 같은 고통을 물려줄 순 없었기에, 좋은 대학과 반듯한 직장만이 유일한 해답이라 믿고, 아들들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는 데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도 공부와 대학은
인생의 전부처럼 여겨졌고,
안팎으로 심어진 ‘성적’이라는 기준은
제 마음속에 자연스레 뿌리내렸습니다.
결국, 보여지는 결과에 제 마음은 조금씩 기울어 안보다는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함께’ 라는 안쪽보다는, ‘흩어져’ 각자 밖을 바라보며 살아갔습니다. 반복되는 가정의 불화와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감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였고, 참고 삭여내며 점점 더 단단하고 차가워졌겠지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모두는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품기보다는, 각자의 틀에 상대를 맞춰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듯,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스스로 보고 배우며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냈을 것입니다.
당시 저에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제 마음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함께했습니다. 그들을 가족처럼 소중히 여겨왔지만, 저 역시 결국 배워온 방식대로밖에 그들을 대할 수 없었습니다.
성인이 되자마자, 인내는 반대로 터져 나왔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자유를 만끽하며 무엇이든 붙잡고 채우려 했습니다. ‘파란만장한 최고의 삶’을 꿈꿨고, 한 번뿐인 인생이니 무엇이든 많고 다양하게 경험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목표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세운 목표들은 하나같이 타인 앞에서 증명 가능한 것들뿐이었고, 비교와 경쟁은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인생은 늘 아쉽고 부족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매번 허전한 마음에,
그 허함을 채우기 위해 또다시
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삶이었습니다.
‘밖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독하게 편향된 삶’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딘가로 기울어진 채, 쉽게 믿고 빠져들곤 했습니다. 때로는 과격하고, 또 무모하게 세상에 저를 드러내며 살아왔지요.
종착역 없는 롤러코스터에 오른 것 같아요.
한쪽으로 과하게 쏠렸던 만큼,
그 반동은 고스란히 아픔이 되어 되돌아왔습니다.
고통을 멈추어 바라보기보다는, 마치 관성처럼 또 다른 보상을 좇아 다음 역을 향해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오르락내리락,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이었습니다.
결과와 타인의 기대에 끌려갈수록,
‘제 자신과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나 자신’을 진심으로 한 번이라도 돌아보지 못했던 것 같아, 그 점이 가장 미안합니다. 잠시라도 멈춰 저를 들여다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제 내면은 외부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나를 알 수 없었습니다.
'나'라는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기에,
혼자 있는 법도, 나를 돌아보며
스스로와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에야 알게 됩니다.
멈추어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었다는 사실을요.
결과 중심의 요즘 사회에서, 겉으로만 본다면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마음먹은 대로 밀어붙이며 살아왔고, 그래서 제 삶을 그럴듯하게 속아왔던 것이겠지요.
‘밖에서 보면 모두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 이야기는,
잠시 멈춰 돌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겠죠.
저도 남들처럼 결혼을 했고, 어느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포기해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났고, 보여줄 타인도, 보여줄 것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욕심’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쫓기만 하던 삶은
결국 고통이 되어 저를 너뜨렸습니다.
삶은 점점 무기력하고, 무의미해졌습니다.
그 고통을 피하려 이번에 손에 쥔 것은 술이었습니다. 더는 마실 수 없을 때까지 매일 술을 마셨습니다. 매번 취한 채 잠이 들었고, 달에 한두 번 맨정신으로 잠들던 날에는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 악몽이 두려워 다시 술을 들이켰습니다.
그땐 그렇게 믿었습니다. 다들 부모가 되면
술로 허한 세월을 달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요.
고통이 쌓이자, 결국 ‘공황’이라는 신호가 찾아왔습니다. 공황장애가 심해질 무렵, 한 지인이 독서를 권했습니다. 오랫동안 책과는 등을 지고 살아왔던 제가, 바로 실천을 결심한 것을 보면 마음속 짐이 꽤나 무거웠던 것 같습니다.
둘째 아이가 자고 있는 침대맡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스스로와 깊이 연결되는
생생한 감각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제 안에는 오랫동안 ‘나 자신’이 부재해 있었고, 그날 느낀 깨어 있는 감각은 매우 명료하고 또렷했습니다. 놓칠 수 없는 동아줄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그 동아줄을 붙잡았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삶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내면의 모습이,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길이 정말 맞는지, 수없이 의심하고 고민하며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주관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저에게 쉽지 않았고, 때로는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다름 아닌 ‘제 마음’이 이 길이 분명하다고, 아주 고요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살아오며 처음 경험하는,
내면 깊은 곳에서의 확신이자 울림이었습니다.
밖에서가 아닌, 제 안에서 제가 만들어낸 모습이었습니다.
그건 분명, 제 마음에서 일어난 작은 기적이었습니다.
변화된 제 모습을 바라보던 아내에게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사실 이게, 내가 살고 싶었던 진짜 나의 모습이야.”
달라진 점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내 마음을 알아주며 살아가는 것이었죠. 툴툴거리며 자신을 방어하고, 변명과 핑계로 버텨내는 삶이 아니라, 내 진심 그대로, ‘당당히 존재하는 삶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책이 준 선물 같은 변화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들을 하나씩 실천해보았습니다. 독후감 쓰기, 일기 쓰기, 봉사활동, 명상… 모두 고요한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고, 결국 나 자신과 마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건 책 한 권이 만들어낸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돌아보고, 스스로 다시 만들어낸
‘저 자신’이었습니다.
행복은 언제나 제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익숙한 관성을 잠시 멈춰 돌아보자, 그제야 제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진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있는 그대로의 저를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편으로, 아빠로, 아들로, 친구로,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나’로 말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초점을 잃은 눈동자들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며 '지금'에 머물지 못하는, 목적에 가득 찬 시선들이지요. 굳은 인상과 함께, 생각에 잠긴 동공은 갈 곳 없이 흔들립니다. 결과를 손에 쥐는 순간, 잠시나마 만족에 잠긴 마음과 시선은 흔들림을 멈춥니다.
그러나 결과는 늘 찰나일 뿐이기에,
우리는 금세 다시 흔들리게 됩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부모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을 살고 싶어 하는 아이와 달리, 부모는 걱정과 생각으로 가득 차 ‘현재’에 머물지 못합니다. 다가올 미래를 앞당겨 기다리느라, 잠시 멈춰 함께 있어주는 일조차 어려워집니다.
결국 아이에게 쉽게 짜증을 내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존재에게 미안함을 느낍니다. 부모는 스스로를 원망하고 후회하며, 또 다른 걱정을 쌓아갑니다.
두 존재의 모습이 너무도 상반되어, 문득 가슴이 아려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그 아이도 결국 부모를 닮아가겠지요.
제가 그렇게 보고, 그렇게 배워온 것처럼 말입니다.
꾼 꿈을 꽤 잘 기억하는 편인데, 유독 자주 꾸었던 꿈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트럭 운전기사입니다. 제 실력에 비해 트럭은 너무 크고, 또 깁니다. 차선을 바꾸거나 주차를 할 때마다 휘청거리기 일쑤였고, 매번 사고가 났습니다.
트럭은 옳다고 믿으며 짊어져온 저의 마음같습니다. 많이 버겁고 또 부담스러웠죠. 뒤 돌아보지 않으니, 그 마음의 짐칸에 무엇이 실려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트럭의 짐을 많이 내려놓았습니다. 트럭은 점점 사라지고 있고, 그 트럭을 몰던 ‘저’ 또한 함께 작아지다가, 이내 곧 사라질 것입니다.
제 안에는 이제 무거운 트럭도,
그것을 몰던 기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진짜 저’만이 남아 있습니다.
[외부에서 내부 중심의 삶으로.]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지금 당신이 바라는 꿈과 목표는,
타인의 시선 없이도 온전한 당신의 것인가요?
당신의 하루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이미 지나간 과거에 고통받고 있진 않으신가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과연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혹시, 제 과거 이야기와 닮은 삶을 살고 있진 않으신가요?
우리는 오늘도 타인이 열광하는 것들을 아무런 의심없이 쫓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물질들, 학벌과 직장이라는 명예와 권력까지 모두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탐해온 것들이죠.
왜 우리는, 이토록 획일화된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걸까요?
그 이유를 여기서 함께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라는 ‘인간’을, 저는 이 책에 고스란히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세상에 영원히
영향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삶의 관성 또한,
본능적으로 지켜내려 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지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면의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외면하거나 회피하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마주하려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와 그 과정을 끝까지 품어낼 책임이 필요합니다.
그 태도가 바로,
‘진짜 나’의 길을 안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이 출발은, 고통을 쌓아온 과거의 관성과는 전혀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당신이 진정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줄 새로운 원동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겉으로는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면의 깊이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여전히, 겉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어 돌아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진짜 행복은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그리고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임을요.
이제는 타인을 향한 외부 중심의 본능을 자각하고, 그 중심을 서서히 내면으로 되돌려내는 여정을 시작할 때입니다.
이 책은, 그런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당신을 다시 맞이하는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당신이 진정으로 살고 싶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