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는 오늘도 멈출 수 없다.
[일상의 의미]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란,
어느새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항상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도 종종 보이지만,
그 모습은 어쩐지 가식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환경이나 성향 차이 때문이라며
스스로 핑계를 대며 방어해 낸다.
그럭저럭 열심히 살아온 인생 같지만,
돈은 늘 부족하고 걱정은 끝이 없다.
분명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너무 짧고 찰나에 불과하다.
요즘 들어 더 쉽게 무기력해지고,
마음 한구석은 자주 답답하다.
그런 마음을 안고 또다시 바깥으로 향하지만,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또 다른 걱정을 만든다.
아무리 푹 자고 쉬어도,
어딘가 한켠은 여전히 막힌 듯 답답하다.
그건 어쩌면, 삶을 돌아보라는 마음의 신호다.
내 진심과는 다른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마음이 알아달라고 조용히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신호를 무시하면,
아픔과 고통은 점점 쌓여간다.
결국 우리는 껍데기처럼
텅 빈 삶 속에 갇히게 된다.
행복도, 고통도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건
내 안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다.
[넘쳐나는 소비]
모든 것이 넘쳐나는 일상이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수많은
지식, 댓글, 영상, 물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기술의 발전은 세상을 기하급수적으로
더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시켰고,
많아지고 빨라질수록 유혹은 더욱 짙어진다.
너무 많고, 또 너무 빠르다.
우리는 정신없이 그것들을 소비해낸다.
즉각적인 소비는 더 빠르고 자극적인 소비를 낳는다.
쉬는 시간조차 쉬지 못하고,
휴식마저 또 다른 보상이라 여기며
영상과 채팅에 몰입한다.
생각 없이 소비하는 기계가 되어버린 우리는
멈출 수조차 없다.
쾌락과 자극은 쌓이지만,
정작 ‘나’라는 존재와는 점점 멀어진다.
자유와 욕구를 보상으로 채우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너무도 무한하다.
결국 채워지지 않을 것을 채우려 하기에,
우리의 일상은 점점 더 공허해진다.
그렇게 우리가 선택한 ‘자유’는
어느새 중독이 되어
조용히 책임을 묻기 시작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채우려 들고,
결국 더 깊은 결핍 속에 빠져들게 된다.
[아이와 부모]
갓난아이 때부터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잡아내며 욕심을 내왔다.
끝없이 탐하고, 바라고, 채워내며 인생을 살아왔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부모가 된다.
주말이면 자식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여긴다.
넘치게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아이를 위한 일이라 믿으며,
모든 열정을 쏟아 부어 무언가를 ‘잡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왜 채워내려 하는지’를 모르기에,
부모는 그저 채워내는 삶을 보여줄 뿐이다.
멈출 줄 모르는 부모는,
멈출 수 없는 아이를 낳는다.
우리는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쥐어보려 한다.
잠깐이라도 함께 멈춰 있으면
‘자식을 방치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조차
내려놓지 못하는 우리다.
멈추는 것은 이제 두렵고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유’를 모르기에, 멈추는 실천조차 쉽지 않다.
그렇게 아이들은 우리를 닮아,
더 많고 더 빠른 미래의 홍수 속에서 허덕일 것이다.
보상에 중독되고, 쾌락에 익숙해져 버릴 것이다.
[죽음과 효율]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에게,
삶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노화는 두렵고,
죽음은 언제나 부정적인 끝으로 인식된다.
젊음을 그리워하며,
우리는 죽음과 시간에 끌려다닌다.
현재에 머무르기보다는, 아쉬운 마음에
더 많고 빠르게 무언가를 잡아내려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많고 빠른 것’은
곧 ‘잘 사는 방식’이자 ‘효율’이 되었다.
그러나 욕망과는 달리,
마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속도나 정보의 양보다,
하나의 경험과 감정에 깊이 머무를 때
비로소 지혜는 쌓인다.
환경의 속도와 마음의 속도가 벌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자신과 멀어지게 된다.
의자는 참 편하고 안락한데,
정작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불편하다.
세상의 효율만 좇다 보니,
마음의 효율은 뒷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진짜 효율은 마음에서 나온다.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야,
세상도 있는 그대로 다가오는 것이다.
[타인이라는 세상 그리고 관성]
오늘날 우리는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아간다.
자랑이라도 해야, 그 삶에 의미가 생긴다.
보여줄 타인이 없다면, 목표도 함께 사라지는 기분이다.
남들처럼 먹고, 일하고, 사랑하다가,
그렇게 생을 마친다.
관성처럼 굴러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아닌 나’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나는 애초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그런 삶을 사는 줄조차 모른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실천을 결심한다.
하지만 멈추기 위해 붙잡은 그것조차,
결국 내 것이 아니었다.
나를 모르기에 타인의 것을 가져온 것이다.
나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맞지 않는 열쇠로는 문이 열릴 수 없다.
결국, 내 마음을 열 수 있는 건
오직 ‘나’라는 열쇠뿐이다.
고요히 멈춰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을 직면하기란 쉽지 않다.
이미 나와 하나가 되어, 삶과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을 강하게 붙잡고 있는 것일수록
실은 당신이 깊이 착각하고 있는 익숙함일 뿐이다.
믿음이 강할수록,
그 안에 숨은 결핍은 더 집요하게 당신을 조종한다.
그 아픔은 당신의 ‘마음’이 보내는 신호이며,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이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은,
몰랐기에 당연했던 나날들이었을 뿐이다.
고통을 돌아보자.
그 안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나’가 있다.
그대의 삶은 어떤가.
관성으로 끌려다니는 삶인가?
아니면, 멈춰 돌아보며 끊어오던 삶인가?
당연한 삶도, 당연하지 않는 삶도
우린 지금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