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삶이란, 우리의 인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어떨까요?
아마 누구나 그런 삶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는 생각대로, 육체와 정신이 따라주고, 결국 ‘결과’라는 성과까지 이루어내길 바라겠죠.
예를 들어, 당신이 구기 종목에 푹 빠졌다고 가정해봅시다.
프로 선수처럼 자세를 잡고 스피드를 내고 싶을 겁니다.
왜냐하면 프로는 ‘정석’이자 ‘효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자세와 움직임에서 나오는 메커니즘은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가질 때, '정석'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석일 때, 최고의 효율 또한 함께 따라옵니다.
즉, 가장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기에, 결과적으로 ‘프로다운’ 성과가 나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성장'입니다.
그리고 그 성장이 향하는 방향은 늘 ‘최고의 효율’이라는 근원을 향합니다.
이렇듯, 성장은 언제나 근원을 향하지만,
"그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근원의 상태에 있어야 하기에',
우리는 성장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 쉽게 닿지 못합니다."
‘운동의 즐거움’만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이는, 이미 운동 속에 성장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래서 자신이 그 성장을 즐기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운동이라는 행위 자체가 이미 자세, 근육, 기술 등 여러 측면의 ‘성장’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이 ‘성장’을 ‘본질’로 향하게 할 때, 우리는 운동에서도, 학습에서도, 관계에서도, 토론에서도,
그리고 삶에서도 ‘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구기 종목에서 공에 에너지를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프로’의 길이며, 동시에 ‘정석’입니다.
‘공에 에너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사실 모든 구기 종목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자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나’와 ‘공’이라는 독립된 객체가 만나, 하나의 에너지 전달을 이뤄냅니다.
이것이 바로 ‘나와 공의 연결’입니다.
각 객체의 특성과 구조를 깊이 이해할수록, 우리는 더 유기적인 만남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공은 강성, 무게, 형태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내가 쥐고 있는 라켓(또는 채) 역시 강성과 무게, 그리고 접촉면의 특성이 있죠.
예를 들어:
베드민턴과 테니스에서는 줄의 탄성을 느껴야 하고,
탁구에서는 러버의 고무 탄성,
골프에서는 샤프트의 휘어짐과 헤드의 만남을 느껴야 합니다.
이처럼 채와 공의 ‘이해’와 ‘만남’,
그 근원적인 순간이 바로 에너지가 전달되는 ‘찰나’입니다.
이제, 채를 쥐고 있는 나 자신을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가장 복합적이며, 힘을 전달하는 주체이죠.
지면의 반력에서 시작된 힘은 코어를 거쳐,
손끝, 발끝, 머리끝이라는 말단까지
관절의 유기적인 통합을 통해 전달됩니다.
이 힘의 흐름이 얼마나 유연하게 연결되는가에 따라,
마지막 ‘전달’이라는 만남이 더 근원적이고 깊이 있게 완성됩니다.
어떤가요?
우리가 바라는 ‘프로’의 길은 쉬워 보이나요, 아니면 꽤나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시나요?
그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스스로를 ‘자각’하기 힘들어합니다.
‘자각’이란 ‘깨어있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며,
그 깨어있음은 곧 삶의 근원적인 상태입니다.
나 그리고 공이라는 세상을 자각하며 온전히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연결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내가 깨어있지 않다면, 운동도, 삶도, 진정한 의미에서 ‘근원’에 닿을 수 없게 됩니다.
둘째, 우리는 ‘나’, ‘도구’, 그리고 ‘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뭐든 쉽게 배웁니다.
언어든, 운동이든,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하죠.
왜일까요? 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비워져 있기에, 주어지는 대로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상을 보고, 코치의 말을 들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미 채워진 내 기준과 방식으로 해석하려 듭니다.
그 결과, 몸은 유연함보다는 힘으로 반응하고,
비워내기보다는 ‘내 방식대로 하려는’ 습성이 작동합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것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중심에 둔 연결된 시야’를 가지는 것입니다.
"중심과 코어를 단단히 세우고, 다음에 다가올 무한한 공을 준비하는 선수의 자세와 같죠."
하나의 유한함을 붙잡는 것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각'과 '있는 그대로'의 비워냄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스스로를 자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해석임을 알기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태도를 가집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면,
자기 안에 갇히고, 세상을 왜곡된 기준으로만 해석하게 됩니다.
결국 운동에서 프로가 된다는 것,
그것은 곧 근원에 닿는 일입니다.
그 근원에 닿기 위해선,
나 자신도 근원적으로 순수하게 비워내야 합니다.
운동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처럼,
삶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는 기존의 기준과 해석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쥐려’ 하죠.
하지만 쥘수록, 나를 자각하지 못합니다.
나를 자각하지 못하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부동산 투자에서 고수라 해도,
‘고수’라는 자기 기준이
오히려 근원의 원리에 닿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수일수록 더 많이 쌓아야 하고,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근원에 닿은 사람은
자신이 ‘고수가 아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삶의 근원은 결국 ‘나를 자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무한해집니다.
그리고 그 무한함이 모든 연결을 이뤄
우리를 근원에 닿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