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레다 Feb 02. 2020

2020년 2월 2일

그리워하는 건 이미 사라진 것이란 걸


13년 전부터 홍대 앞을 좋아했다.

강남에 있던 회사가 자금난에 밀려 홍대의 허름한 사무실로 이전하며 본격적으로 홍대를 오가게 되었다.

관광지가 되어버린 지금의 홍대와 달리 자유롭고 그래서 실험적인 예전의 분위기는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 어딘가를 몰라 답답했던 나에게

훌륭한 휴게소가 되어주곤 했다.

그때 친구가 연남동에 살고 있었다.

그곳엔 철길이 있었고 다가구 주택이 즐비했다.

원주민이 아니고는 딱히 갈 일이 없었다.

친구가 연남동에 살아도 홍대 앞 놀이터에서 만나 그 주변부를 돌아다녔다.

상수역이나 합정역 부근은 '홍대에서 만나'라고 할 때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지금 다이소 홍대점이 있는 자리에 리치몬드 제과점이 있었고,

놀이터 부근엔 고양이 보러 자주 들른 제네럴 닥터가 있었다.

상상마당에서 놀다가 타박타박 걸어 비하인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며느리 밥풀꽃에서 저녁으로 시래기국밥을 먹곤 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꽤 긴 시간을 공유했던 장소들이 모두 사라졌다.

길도 달라지고 그 길을 채우는 사람들도 모두 교체되었다.


이제 홍대는 약속 없이 가지 않는 곳이 되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냥 좋았던 동네는 기억에만 남아있다.

타인을 가르며 슬픔을 삭히고 싶을 때 하염없이 걸었홍대 앞은 사라지고

지금은 이름마저 낯선,

내 영혼의 동네라고 말할 수 없게 된 관광지만 남았다.



카페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카페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웨이브 머리를 늘어뜨리고 상의는 연갈색 퍼 코트를, 하의는 진보라색 레깅스를 입었다.

그 옆 사람은 귀 끝에 닿는 정도의 단발머리에 상의는 베이지색 롱코트를, 하의는 흰색 바지를 입었다.

둘 다 발목에 닿는 길이의 부츠를 신고 곧장 카운터로 걸어갔다.

웨이브 머리를 한 사람이 스팽글로 장식된 클러치백을 열며 지갑을 꺼냈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팔찌와 반지가 번쩍였다.

선글라스를 벗고 카드를 내밀며 웨이브 머리가 말했다.


웨이브 머리 : 어음... 아메리카노 1잔, 라테 1잔 주세요. 뜨겁게요.

직원 : 가지고 가시는 건가요?

웨이브 머리 : 네~ (일행을 보며) 너 뭐 다른 거 먹을래?

커트머리 : 응? 아니, 괜찮아.

직원 : 8000원입니다. 저희 카드 없으시면 하나 만들어드릴까요?

웨이브 머리 : 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직원 : 네~ (띠릭띠릭-) 여기 영수증 있고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내 웨이브 머리의 껌 씹는 소리가 따악-딱- 들렸다.

따악-딱-

따악-따닥-

따악-똑똑똑또옥-딱-호롭-딱-

짭짭-따악-

치아와 혓바닥 사이에서 짓눌리고 밟히는 껌의 비명이

천정고 높은 카페 내부 집기 사이사이와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 고막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직원 :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웨이브 머리 : 네~(스읍) 수고하세요~


두 사람이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웨이브 머리가 단발머리에게 말했다.


웨이브 머리 : 야, (딱-) 넌 인사 좀 해라. 사람이(따악-) 매너가 없냐~ 매너가! 으이그~

단발머리 : 뭘~ 둘 다 인사를 해~ 아, 근데 좀 그런가? 아학학~


딸랑-

카페 문 여닫는 소리 뒤로

두 사람의 껌 소리, 말소리, 구두 소리가 사라졌다.



슬플 때 슬프지 않다고

힘들 때 힘들지 않다고

외로울 때 외롭지 않다

괴로울 때 괴롭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빤한 거짓말을 할 때면

몸이 뒤틀리고 미간이 구겨진다.

거짓말하지 말고

그냥 아, 그렇구나!

슬프구나.

힘들고 외로웠구나.

그래서 괴롭기도 했겠구나.

이해할 것도 포용할 것도 없이 알아주기만 해도 될 것을.

쉬운 일을 어렵게 만들며 사는 일이 제대로 사는 것인 듯 착각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0년 1월 31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