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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레다 Jun 16. 2020

오래된 그림이 말했다.

2020년 6월 16일


한때 뭐라도 될 줄 알았다.

드로잉으로 이름을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돈도 많이 벌고, 작가님 작가님 - 하는 대우도 받길 원했다.

작은 성취에도 휘둘려서 나 잘났소 하며 우쭐대기도 했다.

그런 시기를 떠올릴 때마다 치기 어린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림 하나만으로 내가 설 길은 아주 작고 그 안에서도 부각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음을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그럼에도 긴 시간 동안 욕망을 품었다.

동경의 대상을 바라보면 볼수록 마음이 부서졌다.

부럽고 분하고 실망스럽고 한심스러운 마음이 그림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런 줄도 모른 체 지내다가 한 순간 느꼈다.


'엉망이야. 내가 그린 드로잉 전부.'


애증이 남긴 열병을 앓고 드로잉도 그만뒀다.

애당초 좋아서 그린 건 분명한데

뒤틀린 나의 마음이 그림을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변질시켰다.


얼추 1년 정도 드로잉 할 수 없었다.

대신 몹시 성실하게 밥벌이 그림을 그렸다.

밝고 맑고 건설적인, 상큼 발랄 귀염 깜찍한 그림을 뽑아댔다.

그림에 대해 별다른 기대감이나 실망감, 어떤 승부욕도 없이 평화로웠다.

그러다가 오늘 새벽, 오래된 폴더를 들추다 멈춰버린 드로잉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현듯 알게 됐다.

내 마음에서 나오는 그림은 돈을 바라면 망가진다는 걸.

유명세를 꿈꾸지 말고 제 갈 길 아 가게 두면 된다는 것을.

억지로 길을 만들어 끌고 가려했기 때문에

결국 독이 되고 말았다.


오래 헤어져있다 다시 만나니 보였다.

마음이 그리는 그림, 머리가 그리는 그림은 시작점이 다르다는 사실이.

어쩌면 다시, 마음이 이끄는 드로잉을 시작할 수도 있겠다.

결심이나 다짐 없이 힘을 빼고 가볍게.

헤어졌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얼굴이 좋다.

그림, 특히 드로잉 소재로 얼굴만 한 게 없다.

눈썹과 눈, 코와 입, 얼굴 선, 고개의 각도와 머리카락이 만드는 선들.

각각 자기 위치에 있으면서 자연스레 생긴 -

다양한 궁금증을 만들게 하는 얼굴의 여백이 정말 좋다.

매력적인 여백을 가진 얼굴을 보면

동상 걸린 손처럼 손가락 끝이 간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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