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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레다 Sep 15. 2020

오일바가 속삭였어.

2020년 9월 15일


여름 내내 한 번도 쥐어보지 않았던 오일바를 꺼내보니

녹고 마르기를 반복해서 볼품없이 늙어있었다.

종이 위에 으깨어져 그림으로 남았어야 하는 도구가

제 쓰임을 다 하지 못한 채 흉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이미 늦었다, 이미 늦었어.


가까이 귀를 대면 그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가만히 손에 쥐어보고 나니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의 얼굴은 울 것 같은 표정이었을까.


애틋한 도구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촉감 좋은 종이를 만지면서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대체 지금 뭘 하며 살고 있는 걸까.



길게 쓰다가 한참 지웠다.

백스페이스 키를 꾹 누르면서 지워지는 글자들처럼

이미 알아버려 마음 불편한 무언가를 지워내고 싶단 생각이 든다.

차라리 몰랐다면 가지지 않았을 결정에 대한 압박감과 그에 따른 부담감.

그 마음들만 거둬내도 삶의 질이 좀 올라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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