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강의, 최고의 수강생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뭘 안다고 까불고 있어!
이참에 아버지와 터놓고 대화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지셨지만
아직도 몇 가지 착각하시는 게 있어요.
아버지는 몇 억을 잃어버렸다고 하시는데
계좌 모두 확인해 드렸잖아요.
말씀드릴 건 많지만 절대 믿지 못하실 테니
더 말씀 안 드릴게요.
(정치 이야기는 접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말씀 꺼내실 때마다 걱정 많은 엄마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를 진짜 환자 취급을 하는 겁니다.
아버지 스스로 인정을 하셔야 됩니다.
퇴원이 능사가 아니에요.
아버지는 쉽게 말씀하시지만
솔직히 퇴원 이후가 더 걱정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누굴 만나야 된다,
나가겠다고 하시는 아버지인데
주변에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는 상황에서
엄마가 어떻게 마음을 놓으시겠어요.
아버지가 택시라도 잡아 타고 나가시는 날엔
끝입니다. 경찰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아버지의 반박, 또 나의 반박이 이어졌다.
이제 논쟁보다는 설득이 필요한 시점.
나는 화제를 전환했다.
"아버지, 옆방에 귀여운 할머니 아시죠?
제가 식판 반납하러 갔더니 그 할머니께서
여사님 식판 정리하는 걸 도와주고 계시더라구요.
여사님께서 고마워서 '감사합니다.' 하시니
할머니가 '제가 감사합니다.' 하시는 거예요.
같이 걸어오면서 제가 여쭤봤어요.
'할머니는 뭐가 감사하세요?'
그 귀여운 할머니께서 웃으며 말씀하시더라구요.
'매일 밥 갖다 주시는 게 얼마나 고마워~
저분 덕분에 우리가 밥 잘 먹지~'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감동, 기쁨, 슬픔이 있더라구요.
처음엔 병실에서 무슨 그런 게 있겠나 싶었는데
지내보니 여기서의 삶과 세상이 또 있더라구요.
밖에서 저도 눈 뜨면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면 다시 숙소 가서 자는 것의 반복이에요.
오히려 병원에 와서 느끼는 게 더 많기도 해요.
어디에서나 인생은 계속되고
삶의 의미도, 행복도 계속되는 것 같아요.
내가 꼭 어떤 것을 이뤄야,
어떤 상태에 이르러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디에든 행복은 있는 것 같아요."
어찌보면 진부한 말이었지만 진심이었고,
지금 아버지 상황에 꼭 드리고 싶은 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누워서
조용히 내 말을 듣고 계셨다.
"아버지가 처음 쓰러지신 날,
그때 쓴 일기를 다시 봤어요.
아버지의 모든 기억, 능력이 사라지더라도
감동받는 능력만은 남아있길 기도한다고...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꽃, 시, 누군가의 말에도
감동받으셨고 어떤 상황에도 유머러스하셨어요.
참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게 진짜 아버지라고 생각해요.
여기에서 무슨 감동이 있고 재미가 있고
행복이 있냐고요?
아버지는 그걸 찾아낼 수 있는 분입니다.
제가 만약 아버지라면, 또 엄마라면
이곳에서 귀여운 할머니와 더 대화 나누며
할머니의 삶과 생각에 대해 더 듣고 싶고
그걸 써서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요.
이 상황이 힘들고 괴로울 수 있지만
이 특별한 경험과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의미 있게 다가갈 거라 믿습니다.
삶에서 의미 없는 순간은 없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그 의미를, 감동을
캐치하실 분입니다.
이곳에서, 이 시기에 겪으신 일들을
멋지게 재탄생시키실 거라 믿습니다."
긴 시간 동안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열정을 다해 말씀을 드렸고,
아버지는 생각에 잠기신 듯했다.
아버지는 내 말을 얼마나 알아들으셨을까?
어찌됐건 내가 드리고 싶었던 말들을
다 하고 나니 마음은 후련했다.
어느덧 엄마가 교대하러 오실 시간이 되었다.
외출을 달고 아버지와 터미널로 마중을 나갔고
부모님과 같이 밖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어느 때보다도 농담을 많이 하셨고
많이 웃으셨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휠체어를 타고 온 환자와 그 가족들이
뭐 저리 웃을 일이 많을까
주변 사람들이 궁금해할 정도로.
10년 전쯤, 내가 강사가 될 거라고 했을 때
"니가 무슨 강사냐"며 면박을 주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오늘 내 강의(?)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내 장황했던 말들이
아버지의 뇌리에 박혔기를.
오늘 아버지의 그 많은 농담과
웃음의 이유가 나였다면
아마도 오늘이 내 인생 최고의 강의,
아버지가 내 인생 최고의 수강생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