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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내 나이 돼 봐~"

<다정소감>

by 설작가

올해 사회인 야구 개막전 승리투수!

무실점에 노히트까지!

타격에서도 2루타와 3루타를 때렸다.

이런 날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일기에 기록을 남기다가 바로 위에 적힌

작년 오늘의 기록을 보고 희열이 느껴졌다.

* 작년부터 5년 다이어리를 쓰고 있다.

한 페이지에 5년의 오늘을 한눈에 볼 수 있다.

2년째가 되니 바로 위칸에 적힌 1년 전

오늘의 기록을 보는 맛이 쏠쏠하다.

이제 야구를 그만둘 때가 된 건가.
몸 여기저기가 아프고 구위도 예전 같지 않다.
왕년의 에이스가 이 모양 이 꼴이라니...
팀원들 보기도 민망하고 자신감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만 던지고 싶다. 나한테 오지 마라.' 바란 건 처음인 듯.
'나한테만 걸려라'를 외치던 놈이
이렇게 망가지다니...

1년 전 이 날은 2년의 지방 근무를 마치고

예전에 뛰던 팀에 복귀해

개막전 선발투수로 등판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공을 던지니 어깨도, 엉덩이도

여기저기가 아팠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민이형도 이제 늙었네~


과거의 내 모습을 기대했던 팀원들은

세월은 못 속인다며 실망했고

그때 나를 처음 본 새 팀원들은

쟤가 뭔데 저따구로 공을 던지는 놈을

왜 개막전 선발에 올렸냐는 눈빛이었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최선을 다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만두겠다 결심했다.

늙었다는 말, 한물갔다는 말을

아직 인정할 수 없는 걸 보니

아직은 젊은가 보다.


레슨장을 등록했고 매일 같이 땀을 흘렸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난 요즘 야구에 미쳐있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자기 팀에 들어오라는 콜을 받고 있고

어쩔 수 없이 거절을 못해(여보, 믿어주세요~)

지금 뛰고 있는 팀이 5개다.


무엇 하나에 미쳐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프로선수도 이렇게는 안 한다 싶을 정도로

무리하는 감이 있지만...

팔꿈치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먹고 있지만...

이것마저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팀의 갓 쉰이 된 언니-곧 쉰이 될 언니-반올림하면 쉰이 된 언니 트리오가 구석에 있는 철봉에 무릎을 거친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검은색 운동복을 입고 나란히 그러고 있으니 흡사 박쥐 인간 세 마리 같았다. (중략)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상체를 들어 올려 이마가 무릎에 닿기 직전까지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스무 개씩, 세 세트를.
넋을 잃고 보고 있는 내게 언니 중 한 명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

"어유 야, 놀랄 것 없어. 너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나도 네 나이 때는 딱 너 같았는데, 너도 내 나이 돼 봐.
그럼 이렇게 할 수 있다니까?"

- 김혼비, <다정소감> 中 -


<다정소감>의 이 부분을 읽으며

나도 꼭 이 멘트를 날리고 싶다 생각했는데

그 꿈을 이뤘다.


요즘 레슨장, 야구장에서 동생들이 묻는다.


형님, 요새 뭐 좋은 거 드세요?
어떻게 실력이 더 좋아져요?


그럴 때마다 쿨내를 풍기며 답한다.


너도 내 나이 돼 봐.
그럼 이렇게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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