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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받아주세요."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by 설작가
그저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아이가 존중받는다고 느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친절하고 자상한 어른들의 교양 있는 폭력이 아이들 입을 틀어막기도 한다. 아이들 받아주려고 하지만 아무리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어디까지 받아줘야 하냐고? 답은 늘 같다.
"끝까지 받아주세요. 딱 한 번만이라도!"
- 박영숙,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중에서 -


아내가 모임이 있어 1박 2일 자리를 비웠다.

일요일인 오늘, 아이들은 그동안 밀린 숙제를 마무리해야 했고 나는 그 숙제를 챙겨야 했다.

내가 보기엔 방학 내내 집에서 놀며 남는 게 시간인데 주말은 또 주말이라고 놀며 마지막까지 숙제를 미루는 아이들을 보면 '그래~ 놀 수 있을 때 많이 놀아라~ 너희 정도면 훌륭한 거야~ 내가 너희만 할 땐 더했단다~' 싶으면서도 아이의 습관을 형성해 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인데 이렇게 계속 내버려 둬도 되나 갈팡질팡하게 된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가는 둘째 녀석은 책상 앞에 앉은 지 3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다 끝냈단다. 뭐야, 숙제가 너무 적은 거 아니야? 어쨌든 자기 할 일을 다 끝냈다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놀아라~

하지만 올해 중학생이 되는 첫째 녀석은 사정이 달랐다. 학원에서 내 준 숙제량이 꽤 많았다. 초저녁에야 책상 앞에 앉은 아이는 한숨을 푹푹 쉬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게 미리 좀 해 두지...


방문을 닫고 있으니 안에서 숙제를 하는 건지 딴짓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궁금하기도 답답하기도 했지만 감시하는 느낌을 줄까 봐, 잔소리로 들릴까 봐 그냥 기다려줬다. 그러다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 노크를 하고 방에 들어갔다. "아직도 많이 남았어? 아빠가 뭐 도와줄 거 없어?" 아이는 남은 숙제를 하나하나 설명하며 내가 옆에서 알려주면 좋겠단다. 숙제를 봐주기 전에 스스로 일정을 계획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했다. 엄마 아빠도 계속 믿고 지켜보고 있는데 계속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혼자서 어려울 것 같으면 엄마 아빠가 도와주면 어떻겠냐고... 아이는 일주일 정도 더 스스로 해보겠다고 했다. 본인도 한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으니 답답하고 속도 상하겠지...


영어 단어를 쉽게 외우는 법을 설명해 주고, 영어 문장을 해석하고 숙제를 쉽게 하는 법 등을 알려주니 나도 재미가 있었다. "아빠, 공부방 차리셔도 되겠는데요?" 그래... 아빠 맘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회사 때려치우고 공부방 차리고 싶다... 네가 그렇게 얘기해 주니 작은 희망이 보이는구나~


잠시 머리 좀 식히라고 딸기를 손질해 아이들을 식탁으로 불렀다. 딸기만 보면 환장을 하는 둘째는 형이 식탁에 오기도 전에 다 먹어치울 기세로 달려들었다. "안돼! 형 오면 같이 먹는 거야~" 둘째는 입이 삐쭉 나왔다. 애간장 타는 동생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첫째는 느릿느릿 식탁에 앉더니 웹툰 만화책을 느긋하게 넘겼다. 동생의 폭격이 시작됐다. 형은 몇 개 집어 먹지도 않았는데 남은 딸기까지 다 먹어치워 버렸다. 평소 자기부터 챙기고, 손해는 안 보려 하고,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여온 터라 한마디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둘째는 자기가 뭘 잘못했냐며, 안 먹고 늘이고 빼는 형한테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냐며, 왜 자기한테만 가혹하게 하는 거냐며 따지고 들었다. 허허... 이 놈 봐라~


"준이한테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형도 고칠 점이 있으면 말해주고 있어. 너희들은 너무 잘하고 있지만 더 멋있는 사람이 되라고 개선할 점을 말해주는 거야. 준이는 자기 할 일을 미리미리 다 하려고 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양보하지 않고 자기 것부터 챙기는 모습을 고쳤으면 하는 거고, 형은 양보는 잘 하지만 하고 싶은 것만 하다가 정작 해야 할 일은 계속 미루는 걸 고쳤으면 하는 거지. 둘이 스타일이 정말 달라~ 지금도 봐. 형은 할 일 많아도 저러고 있잖아~"


농담 식으로 툭 던진 말에 첫째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책을 팍 덮으며 "아~ 알았어요! 그만 볼게요!" 하며 방으로 들어가더니 책상을 쿵 내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

순간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며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이 신경질적인 반응은...

애를 불러 앉혀 얘기를 할까 싶었지만 나도 감정적으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도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해서 이따 대화를 나눠보는 게 좋을까? 우리 아이는 사춘기 없이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사춘기가 온 건가?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냥 믿고 기다리는 게 답이라는데 아무 일 없었던 듯 지나가는 게 답인 걸까?


한숨 돌리며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받고 자책하고 있는 상황에서 울고 싶은 놈 뺨 때린 건 아닌지. 아이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이것도 모르냐는 눈빛, 그러게 왜 지금까지 미룬 거냐 탓하는 눈빛으로 아이를 궁지에 몰아넣은 건 아닌지... 어른인 나도 내가 할 일을 미루고 무절제하게 살면서 아이에겐 정답을 얘기하는 게 아닌지...


I always knew what the right path was.
Without exception, I knew.
But I never took it. You know why?
It was too damn hard.
(난 언제나 바른 길을 알았죠.
한 번도 예외 없이, 난 알고 있었죠.
하지만 난 그 길을 뿌리쳤어요. 왜냐고요?
그 길은 너무 어려워서죠.)

- 알파치노, 영화 <여인의 향기> 중에서 -


그러다가도 부모가 이 정도 말도 못 하면 아이가 뭘 하든 그냥 내버려두라는 건가도 싶고... 어려운 시기가 온 것 같다. 접근 방식을 고민할 시점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아이도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을 다시 얘기하지 말자.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짧고 굵게 끝내자.

시시콜콜 설명하지 말고 아이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백을 두자.


그렇다고 오늘 이대로 아무 말 없이 잠자리에 든다면 그것도 찝찝할 것 같았다.

아이도 홧김에 분풀이를 해놓고 마음이 불편한 상태일 것이다.

마침 아이가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왔다.


"윤아, 아빠 먼저 잘게. 늦었으니까 윤이도 얼른 자~

그리고 아까 아빠 때문에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


윤이는 당황한 듯 말없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내가 먼저 눈을 피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속 깊은 윤이가 울 것 같아서...

여백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 앞에서 아이들은 놀라울 만큼 너그러워진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딱 하루만 아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걸 요구하고 윽박지르며 지내는지, 아이들이 그런 어른들 억지와 고집을 얼마나 잘 받아주고 참아주는지 말이다.
- 박영숙,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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